▲ 지기학 예술감독

  “설렌다. 그동안 직장생활이 익숙해서 안주한다는 느낌이었는데 이제 새로운 긴장감이 생긴다. 제 창극 스타일이 조금씩 변화해 왔는데 인식 전환지점에서 새 길이 열린 것이다.”
  21년 동안 국립민속국악원에 몸을 담았던 지기학 예술감독(55)이 새로운 시작을 눈앞에 두고 있다. 내년 1월말로 계약이 끝나는 그는 임기를 연장하지 않고 자리를 물러날 예정이다. 지난 18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카페에서 그를 만났다.
  지난 7월 마포문화재단에서 펼쳐진 판소리 ‘빨간 피터 이야기’는 창극계 화제였다. 카프카의 소설 <어느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1시간 반짜리 판소리로 만든 작품이다. 그는 1시간가량 혼자서 이야기를 이끌어 갔다.
  “소리꾼은 가수가 아니다. 이야기꾼이다. 판소리의 본질이 이야기 전달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음악적으로 확대돼 현재의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원래 모습을 고민해 보면 전통적인 게 답이다. 많은 판소리 선생님들의 가르침이 가창법을 위한 것 일 수도 있지만 본질은 이야기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한 것이다. 서정시를 노래했던 가사, 가곡 등 전통적인 가창법을 서사시를 노래하는 방법으로 변주시킨 것들이 것이 판소리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민속국악원에 입단했을 때부터 연출을 하게 됐다. 연극배우 출신이란 점 때문에 낙점(?)이 됐고 그 기회는 오늘의 지기학을 만들었다. 그는 최근 국악원 주최 작창 세미나에서 ‘빨간 피터’를 소개하면서 판소리를 다시 정리할 기회를 가졌다. 결론은 역시 ‘소리꾼은 이야기 꾼’이라는 생각이다.
 

▲ 춘향실록

이런 신념은 그가 연출한 창극에서 도드라진다. ‘춘향 실록’, ‘빅터 춘향’ 등 그의 창극은 ‘세련됐다’ ‘새롭다’는 평가를 받는다. 연극배우 출신의 소리꾼이라는 시선 때문에 그의 창극은 연극적일 것 같지만 전혀 아니다. 그는 창극을 구성할 때 연극 무대가 아닌 영화의 ‘장면’을 생각한다. 생략과 전환이 판소리가 갖고 있는 기본 속성이라는 점 때문에 그렇다.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사각 무대도 최소한의 장치다. 판소리가 만들어져 공연되던 시기에는 병풍과 돗자리도 없었다는 생각이다. 그의 전통적인 창극은 ‘전통을 고수하기에 오히려 세련되게 느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요즘 창극은 세트와 조명 등 설명적인 무대 장치가 많이 사용되는데 지 감독의 작품은 ‘이야기꾼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원형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오히려 세련돼 보이고, 관객들을 이야기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특히 소리꾼이 옛날부터 사용했던 부채 하나로 극을 이끌어 가는 게 인상적이다.”(한지영 소리축제 프로그램 팀장)
  창극에 대한 그의 애정은 ‘판소리를 새로 생산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예술감독 직을 물러나면 가장 하고 싶은 일도 바로 그 일이다. 판소리 음악성이 창극으로 이어지면서 공생 발전해 온 ‘춘향전’처럼 잘 짠 판소리를 멋진 창극으로 만들어 보고픈 욕심이다.
  “판소리 판본을 희곡으로 만들고 판소리적 음악성을 창극에 담아내고 싶다. ‘빨간 피터 이야기’는 3년에 걸쳐 판소리로 짰고 결국 1인 창극이 가능한 음악적 베이스를 구축했다. 10년전 음악극으로 선보였던 ‘마당을 나온 암탉’도 80분 짜리 판소리로 먼저 만들고 싶었지만 여러 사정으로 현재까지 만들지 못했다. 황선미 작가와 협의 등이 잘 된다면 저의 2번째 판소리가 될 가능성이 높다.”
  ‘마당을 나온 암탉’은 창극으로 먼저 선보인다. ‘민속국악원 지기학 예술감독’의 마지막 창극 작품으로 29일과 30일 두 차례 공연된다. 청동 기둥 하나와 검은 색 보자기 1개로 창극을 풀어나간다고 한다. ‘판소리는 무엇이고 창극이 무엇인지’에 대한 그의 고민을 확인하는 공연이 될 것이다.
  “새로운 판소리를 생산하겠다”는 약속이 “전북에 뼈를 묻겠다”는 다짐과 함께 어떻게 지켜질지 기대해 본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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