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성환 전주시설공단 이사장

연말이 다가온다. 이런저런 명목의 회식 자리가 많아진다. 이때 빠지지 않는 것이 건배사다. 첫 건배사는 예외 없이 그 자리에서 가장 높으신 분이 한다.
근데… 왜 그런 거지? 가장 최근에 입사한 신입사원 또는 그 자리의 막내가 첫 건배사 하면 안 된다는 관습법이라도 있는가? 엉뚱하고 발랄한 메시지가 나오거나 뜻밖의 상황이 연출돼서 분위기가 더 흥겹고 부드럽게 만들어질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사회가 많이 민주화 되었다고는 하나 일상 속의 권위주의, 엄숙주의, 틀에 박힌 행태들은 여전히 봉건시대에 머무르고 있는 것 같다.
우리 회사의 50대 부장 한 분은 지금도 아내가 자동차를 탈 때 자신이 직접 조수석 차문을 열어 준다고 한다. 이건 참 멋지다! (단, 내 아내만은 이 사실을 모르길 바랄 뿐이다.)
그러나 직장에서 단지 윗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자동차문을 열어주는 건 대체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법도인지 모르겠다. 양손에 물건을 들고 있는 것도 아니고 깁스를 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영혼 없는 의전’을 없애면 윗사람의 권위가 흔들리고 무시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일까?
재작년으로 기억한다. 전직 총리 한분의 과잉의전이 여론의 도마에 오른 적이 있다. KTX 플랫폼까지 관용차가 들어오고, 총리의 승용차를 대기 위해 시민들이 대기 중인 버스정류장을 다른 곳으로 옮긴 사건은 유명하다. 이 사건이 시민 제보로 알려지면서 그 총리는 권위를 인정받기는커녕 존경이나 신뢰도 면에서 큰 손상을 입었다.
시대가 바뀌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초기에 탈권위적이고 소탈한 모습으로 국민에게 신선한 감동을 선사했다. 대통령과 청와대 참모들이 각자 커피 잔을 들고 담소하며 걸어가는 모습은 정권교체를 상징하는 장면으로 회자되었다. 새 시대가 왔다는 것을 실감케 하는 장면이었다.
대통령이 집무실에서 양복 윗저고리를 벗을 때 그것을 받으려는 비서관을 만류하고 자신이 직접 옷을 거는 모습 또한 그 어느 국민이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이것들이 시사하는 바가 무엇인가? 권위주의, 엄숙주의, 과잉의전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다. 이제 깨어있는 국민들은 그런 것을 우습게 본다. 다만 서로 간에 '인간에 대한 예의'만 제대로 지키면 될 것이다.
그럼에도 국민 생각의 변화를 읽지 못하고, 기업이나 공직사회에서 크고 작은 행사가 열릴 때마다 아직도 윗분들의 자리 배치, 발언 순서와 길이, 건배사 순서 등을 놓고 핏대를 올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권위와 권위주의는 다르다. 권위는 내가 스스로 내세운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고, 나의 지식과 통찰력, 영향력 등을 타인들이 자발적으로 인정해줄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다. 반면 권위주의는 지위에 따른 권력과 힘을 내세우며 타인에게 강제하는 태도다.
겉으로 드러나는 의전과 권위주의 부질없는 것이다. 눈앞에서는 예의와 공손함을 깍듯이 갖추면서도 속으로는 얼마든지 경멸하고 무시할 수 있다.
소소한 의전으로부터 자유로운 사회, 계급장 떼고도 서로를 존중하며 잘 돌아가는 사회를 꿈꿔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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