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

오피니언l승인2018.11.29l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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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천변으로 가벼운 발걸음을 옮겼다. 온통 신 록인 산이 선명하게 보이고 하늘은 높고 푸르다. 바람은 선선하고 시냇물은귀를 편하게 한다. 이런 날씨에는 천천히 걸으면서 그리운 지난 시절을 떠올리고 싶어진다. 눈에 들어오는 것을 아무런 생각 없이 지나치며 천천히 걷는다. 멀리 도로 건너편에 이삿짐 차량이 뽀얀먼지를 내며 지나가고 있고, 그 뒤를 작은 꼬마가 달려가고 있다. 그 모습이 초등학교 시절의 옆집 짝꿍같아 잠시 추억에 잠겨본다. 등학교 때였다. 산골에서 경산시내로 이사를 했다. 이사를 하는 날 나는 이삿짐 차 짐칸에 타고 있었다. 시골이라 포장도로였는데 뽀얀 먼지를 내며 달려가는 이삿짐 차를 보고 눈물을 흘리면서 달려오는 아이가 있었다. 옆집 주근깨투성이 짝꿍이었다. 내 이름을 부르며달려오는 그녀를 보고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주근깨투성이인 그녀는 옆집에 살았다. 우리는 매일 수돗가에서 놀았다. 엄마아빠 놀이도 하고 손톱에 물을 들이며매일 놀았다. 그녀는 유난히도 봉숭아물을 들이기 좋아했다. 수돗가에서 쪼그리고 앉아 봉숭아꽃을 빻아 서로 손톱에봉숭아물을 들여 주었다. 봉숭아물이 든그녀의 손톱은 늘 반짝거렸다. 주근깨투성이의 얼굴은 자세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봉숭아물을 들인 반짝거리는 손톱만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내 가슴에 남아 있다. 대학 입시가 끝나고 그녀를 다시 만났다. 비오는 날 미팅에서 우연히 그녀를 났다. 어두운 불빛 속에서 그녀의 손가락은 봉숭아꽃 물을 들인 것처럼 여전이 빛났다. 반짝거리는 손톱이 어린 시절 같았다. 바깥은 비가 내렸다. 내가 조금 앞에서 걸어가고 있는데 갑자기 그녀가 내 우산 속으로 들어왔다. 자신의 우산을 접고 내게 들어 온 것이다. 그 뒤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만나 어린시절 이야기를 하곤 했다. 마지막 만남은 군 제대 후 얼마 지나지 않은 때이다. 추석 성묫길에 그 집을 들른 것이다. 어린 시절 손톱에 봉숭아꽃을 물들인 기억이 있어 그녀의 집을 찾았다. 혼자가 아니었다. 우는 아이에
게 젖을 물리면서 아무렇지 않게 내 근황을 물었다. 나와 다른 세상에 사는 사
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주근깨도 없었다. 병원에서 주근깨를 없앴다고 한다.
주근깨가 사라진 얼굴이 낯설기만 했다. 빨갛게 물을 들인 그녀의 손톱은 나에게
더 이상 반짝거리지 않았다. 그녀 앞에만 서면 느낄 수 있는 작은 떨림도 사라
졌다. 저마다 가슴속에 소중한 추억을 간직하고 살아간다. 그것은 사람이 될 수도
있고 사물이 될 수도 있다. 삶이 건조할때 아련한 추억을 떠올려 보면 촉촉한
단비가 된다. 세월이라는 더께를 털어내는 순간 단비는 그치고 다시 건조해 진
다. 피천득의 인연이란 수필의 마지막 구절이 기억난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
야 좋았을 것이다.”경산 천변을 걸으며 이런 생각을 한다. 지나간 것은 그냥 내
버려두는 것이 좋지 않을까. 추억은 세월이란 먼지를 털어내는 것이 아니라 지
켜보는 것이 아닐까. 가끔 떠올려 보고 먼지 앉은 채로 접어 넣어두는 것이 추
억을 아름답게 간직하는 방법이 아닐까. 멀리 이삿짐 차가 보이지 않는다. 뽀얀
먼지도 달려가던 어린아이도 보이지 않는다. 빈 도로위에 추억만 짙어가는 잔
인한 여름이다.
/박태효(국민연금공단 연금급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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