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민호 한국은행 전북본부 기획조사팀장

말벗이 필요했던 한 노인이 앵무새 가게를 찾는다. 어리면서도 다양한 언어를 구사할 수 있어 비싸게 팔리는 앵무새들을 뒤로 하고, 노인은 늙고 깃털이 허옇게 센 한 앵무새를 가리키며 가격을 묻는다. 가게 주인은 그 앵무새가 가장 비싸다면서 그 이유를 궁금해 하는 노인에게 이렇게 답한다. “그건 우리도 모릅니다. 우리가 아는 건 단지 다른 앵무새들이 그 앵무새를 의장님(Mr. Chairman)이라고 부른다는 것뿐입니다.”
미국의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의 의장을 역임(1979~1987)한 폴 볼커는 자신을 늙은 앵무새에 비유하는 이야기로 회고록을 시작한다. 자신이 책을 쓰게 될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던 그는, 공익적 가치와 정부에 대한 믿음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회복시키는 데 도움을 주고자 그가 수십년간 공직에 몸담으면서 얻은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회고록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지난 10월말 출간된 이 책에는 정치권과 금융계의 온갖 비난과 공격을 감내하면서 ‘좋은 정부’를 유지하고 화폐 가치에 대한 대중의 신뢰를 지키기 위하여 쉼 없이 전력을 다한 ‘늙은 앵무새’의 지혜와 신념이 응축되어 있다.
한 세계적인 경제평론가는 이 회고록에 대한 서평에서 폴 볼커가 그가 아는 가장 위대한 사람이라고 칭송하면서, 그가 로마인들이 덕(德)이라고 불렀던 도덕적 용기, 정직, 현명함, 신중함과 국가에 대한 봉사정신을 타고 났다고 말한다. 폴 볼커가 이러한 미덕들을 발현시켜 공공의 이익을 크게 증진시킨 가장 대표적인 사례를 들라면 모든 이들이 1979년 이후 3년간 그가 이끌었던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1970년대 말, 고삐 없는 말처럼 날뛰던 인플레이션 앞에서 경제정책 담당자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당시 카터 대통령은 폴 볼커를 인플레이션을 길들일 수 있는 적임자로 보고, 그를 연준 의장에 임명할지를 결정하기 위하여 면담을 요청한다. 폴 볼커는 면담을 앞두고 대통령에게 얘기하기로 마음먹은 세 가지를 메모에 적는다. “저는 연준이 독립적이어야 한다는 확고한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연준은 앞으로 인플레이션과 전면전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제 전임자보다 더 긴축적으로 정책을 운용할 것입니다.”
1979년 8월 연준 의장에 취임한 그는 불과 한 달여 만에 정책금리를 세 차례나 인상하지만 인플레이션은 하락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연준의 전통적인 점진적  금리인상 방식으로는 대중의 기대인플레이션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같은 해 10월부터 정책금리를 큰 폭으로 인상하는 한편 통화 증가율도 억제하는 전례 없이 강력한 긴축정책을 펼친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실업률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경기가 침체되자 그는 거센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와 연준 건물 앞에서 시위를 벌이는가 하면 건축업자들은 금리를 내리라는 협박 메시지를 보내고, 총기로 무장한 이가 연준 이사들을 인질로 잡기 위해 난입하는 사건까지 벌어진다. 심지어 그를 연준 의장에 임명했던 카터 대통령조차도  재선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그의 통화 긴축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압박에 굴하지 않고 인플레이션을 낮추겠다는 일념 하나로 긴축정책을 지속시킨다.
폴 볼커의 과감하고도 일관된 정책 덕분에 1980년에 15%까지 치솟았던 인플레이션은 1982년 말에는 4% 수준까지 하락한다. 인플레이션과의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결정적 증거는 그의 운전기사로부터 나왔다. 어느 날 우연히 운전기사 옆 좌석에 놓인 ‘어떻게 인플레이션과 함께 살아갈 것인가?’라는 책을 발견하고는, 자신의 운전기사마저 자기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낙담하던 폴 볼커에게 운전기사는 이렇게 말한다. “11달러 하던 책값이 2달러로 떨어져서 그냥 샀을 뿐입니다.”
폴 볼커는 연준 뿐만 아니라 전세계 중앙은행에 대한 신뢰를 획기적으로 끌어 올린 인물로 평가 받는다. 그러나 인플레이션에 대한 그의 승리는 그 혼자만의 노력으로 얻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친근하고 겸손하지만 통화정책과 연준의 독립성에 관한 한 한 치의 양보도 없었던 마틴 전 의장(1951~1970)이 그에게 깊은 영감과 힘을 주었고, 그의 정책을 지지하고 실행시킨 훌륭한 동료들이 있었기에 그 승리가 가능했으리라.
그가 회고록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교훈은 그가 근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세 개의 가치들, 즉 ‘안정된 물가’, ‘건전한 금융’ 그리고 ‘좋은 정부’로 요약된다. 최근 들어 트럼프 대통령은 “연준이 미쳤다”, “우리 경제의 유일한 문제가 바로 연준이다”라는 등의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들로 경제정책에 대한 불신과 미래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을 확산시키고 있다. 화폐에 대한 신뢰가 좋은 정부와 경제성장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기 때문에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더욱 존중해야 한다는 늙은 앵무새의 지혜를 깊이 새겨들어야 할 때이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