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독립운동가 신채호-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린도전서 10장11절-

 

흔히 역사는 미래를 보는 거울이라 한다. 과거를 기억하지 않고는 미래도 없는 이유다.

2019 기해년(己亥年)은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해다. 100주년을 맞는 일은 단순 시간이 도래한 것만의 의미는 아닐 테다.

대통령직속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3·1운동의 의의로 ‘ 대한민국의 출발점이자 근대 한국 민족주의 운동의 뿌리’라 설명하고 있다.

헌법 전문에도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등 대한민국 건국 원천이 3·1운동에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민족 대통합을 야기하고, 세계사에 피지배국가의 독립 정신을 일깨운 3·1운동. 그러나 유구한 역사만큼 잊혀 아득한 이야기가 됐다.

진보와 보수, 지역 간·세대 간 갈등, 양극화 문제 등 그 어느 때보다 사회 통합이 절실히 요구되는 오늘날 전북 3·1운동 발자취를 쫓아 그 정신을 다시금 되새기고자 한다.<편집자주>

 

△ 서울 이남 최초, 호남 독립만세운동 발원 군산

1919년 3월 5일 군산시(당시 옥구군) 구암동, 이곳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영명학교(현 제일고) 학생들과 기독교가 주축이 됐다.

쌀 수탈 거점지로 많은 일본인이 거주한 당시 군산 상황에서 성공적인 독립만세운동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1919년 2월 26일 영명학교 졸업생이자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학생인 김병수는 3·1운동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으로부터 독립선언서 200여매와 태극기를 전달받고 군산에 향했다.

군산에 당도한 김병수는 영명학교 은사이자 구암교회 장로인 박연세의 집에서 영명학교 교사 이두열, 김수영 등을 만나 서울의 상황을 알리고 장날인 6일을 기해 독립만세운동을 거행하기로 도모했다.

하지만 하루 전인 5일 경찰에 누설되면서 이들은 연행, 독립만세운동이 무산될 처지에 놓였다.

당장 거사를 벌이는 데 뜻을 모은 학생들은 태극기 3500매와 독립선언서를 꺼내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며 군산경찰서로 향했다.

대열에는 구암교회 교인과 멜본딘여학교 학생, 예수병원 직원 등이 합류했다. 경찰서에 당도했을 때 몸집은 1000여명(당시 군산 인구 1만3604명)으로 불어났다.

시위대는 일제 군경의 무자비한 무력 진압으로 해산됐으며, 90여명이 검거돼 투옥됐다. 군산에서의 만세운동은 이날을 기점으로 5월까지 28차례에 걸쳐 3만700여명이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53명이 숨지고 72명이 실종됐으며 195명이 부상을 입었다. 또 김병수, 박연세, 이두열 등은 주동 인물로 분류돼 징역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군산에는 이날을 기념해 호남지방 만세운동 발원지인 구암동 일원에 3·1운동기념관, 3·1독립운동 기념비 등을 조성해 희생된 순국선열을 기리고 그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 남문 일대에 울려 퍼진 “독립만세” 전주

1919년 3월 1일 전주군 천도교 교구실, 서울에서 온 이종익으로부터 독립선언서 1000여장과 함께 서울에서의 상황이 전달됐다.

천도교구 직원 배상근, 김진옥 등은 곧장 임실군 천도교 교구실과 익산, 이리, 함열, 김제, 옥구, 무주, 정읍, 태인, 순창, 고창, 금산, 부안 등 각 지방으로 전파했다.

또 교인 민영진, 김태경, 서호순 등 일부를 통해 예수교회 측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는 등 교회 조직을 통한 거사를 도모했다.

거사 예정일인 3월 13일, 전주 남문 일원에는 일제의 삼엄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신흥학교 학생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정오 남문에서 울린 인경소리를 신호로 거사는 일제히 개시됐다. 천도교, 예수교인, 신흥학교 및 기전학교 학생을 중심으로 150여명이 남문시장부터 태극기를 들고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짖었다.

대열은 삽시간에 불어나 남문에서 공립제2보통학교, 대화정을 지나 대정정, 우편국 앞까지 행진했다. 거리는 태극기와 독립 만세의 물결로 넘쳐났다.

정오부터 시작된 독립만세운동은 자정을 넘겨 다음 날 새벽 2시까지도 독립만세와 검거된 애국 동포 석방을 외치며 곳곳에서 계속됐다. 이날 전주 읍내에서 검거된 인원만 300여명에 이르렀다.

전주에서의 독립만세운동은 이날을 기점으로 차츰 분산적이고 장기적인 운동으로 들어섰다.

18일 초포면 송전리 들판에서 동민들이, 23일 전주 장날 장꾼들이 태극기를 들고 군청과 경찰서, 분주소, 재판소 등 일제 기관 앞에 서는 등 산발적으로 이어갔다.

전주에는 지역 3·1운동 발상지인 남부시장 매곡교 인근에 3·1운동기념비 등이 조성됐다./권순재기자·aonglhus@

 

[생존 애국지사로부터 듣는 3·1운동]

“3·1운동은 오늘날의 대한민족의 정신적 원천이자, 우리가 나아가야 할 미래의 좌표입니다.”

독서회를 조직해 민족정신을 고취시킨 이석규(94·전북 유일 생존 애국지사) 옹은 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소감을 전했다.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겪은 치욕스런 사건들은 모범생이었던 그의 인생을 180도 바꿔 놓았다.

“어느 날 목욕탕에 갔는데 다짜고짜 ‘더러운 조센징’이란 욕설과 함께 마구 때리더라고. 나중에 알고 보니 일본인 전용 목욕탕이라는 거야. 우리 땅에서 일본인이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것도 분한데, 거기에 일본인들한테 구타까지 당하고 나니 큰 충격이었어.”

이 옹은 1943년 76년 전을 회상하며 담담하게 이야기해 나갔다. 당시 조선을 점령한 일제는 땅과 자유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말과 글도 빼앗아 갔다.

학교에선 일본말과 일본 역사를 가르쳤다. 담벼락에 걸린 일왕 사진을 지나칠라 하면 허리를 굽혀야만 했다. 학생들을 소집해 일왕 사진을 내걸고 머리를 조아리도록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교육이라 할 것도 없이 군사훈련이 주를 이뤘으며 노동력 동원도 줄곧 이어졌다. 학생들의 반발에는 무력이 뒤따랐다.

일제의 모진 탄압 속에 반일감정을 갖게 된 이 옹은 이후 일본인들을 무작정 구타하고 도망 다니다가 1개월의 무기정학까지 받았다.

그해 3월 뜻이 맞는 지인 17명과 함께 독립운동 조직인 ‘무등 독서회’를 결성, 이때부터 항일 운동에 가담했다.

매월 2차례 이상 독서모임을 갖고 독립 쟁취와 전통 역사관 확립을 위해 힘쓰는 한편, 일제의 군사훈련과 징병소집에 반대 투쟁을 벌이며 활발한 항일 운동을 벌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비밀 연락원으로도 활동하며 당시 상해임시정부 밀령을 받아 정보를 교환하고, 태극기를 제작했다.

또 10개월 넘는 투옥 생활로 모진 고문으로 고초를 겪다 이듬해인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맞아 출옥할 수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온갖 고문을 당했어.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모두를 싸잡아 붙잡았는데 어찌나 고통스러웠는지. 죽음의 고통도 여럿 넘겼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일제의 탄압과 억압에 저항한 무등 독서회의 자료는 현재 독립기념관 항일 투쟁관에 전시됐다.

이석규 옹은 “역사는 오늘을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며 현재를 정확히 알고 미래를 올바르게 전망하기 위한 거울이다. 이를 외면해선 안 된다”며 “3·1운동 정신에 따라 민족 통합과 통을을 위한 지혜로 쏟아야 할 것이다”고 말했다./권순재기자·aonglh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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