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길

오피니언l승인2019.01.09l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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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성우 국민연금공단 기획조정실

 밤길을 걸었다. 친한 친구이던 영화 때문에 탈이 났다. 소름끼치는 공포영화를 본 탓에 홀로 집 안에 있을 수가 없었다. 한밤중이라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하릴없이 동네 여기저기를 걸었다. 밤인데도 별로 어둡지 않았다. 오히려 수명이 거의 다 된 전구를 켠 방 안처럼 느껴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보름달이 눈부시게 떠 있고, 주변은 달무리로 포장까지 되어 있었다. 달과 마주한 순간 과거에 홀로 걸었던 밤이 생각났다.
 취업준비생이던 시절, 소지금의 여유가 없어 남학생 공부방에서 살았다. 한 달 임차료가 5만원에 불과한 곳이라 시설 상태는 많이 좋지 않았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다. 신발은 모두가 다니는 복도에 놓아야 했고, 공동 화장실에서 바가지로 물을 퍼서 끼얹으며 몸을 씻었다. 식사는 평일엔 산 중턱에 있는 학교식당에서 하곤 했지만 문을 열지 않는 주말엔 하루 한 끼 정도가 고작이었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릴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당시 처지가 부끄럽기도 했고, 괜히 자존심이 상했던 탓이었다.
그 무렵 나는 각종 공포에 시달렸다. 미래, 삶, 건강, 정신 등 나를 둘러싼 거의 모든 것에 대해 확신이 없었다. 그리고 불확실성이 안겨준 불안함은 곧 나의 공포가 됐다. 세상은 잘 갖춰진 시스템에 의해 너무나 규칙적이고도 안정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만 홀로 배제된 채로. 나는 공포에 사로잡혀 밤새 깨어 있다가 아침이 오면 자고, 오후에 일어났다. 가족을 포함해 그 누구도 만나지 않았고,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밤새 영화만 봤다. 당시의 나는 모두가 두려웠다.
어느 겨울 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한밤중에 외출을 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빛나는 보름달이 떠있었다. 달을 잠시 바라보자 알 수 없는 환희에 휩싸여 가슴이 벅차올랐다.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나에게만 온전히 주어진 선물 같다는 생각이 들어 눈물이 났다. 조금 더 달에 다가가 보려 했다. 학교를 지나 산 정상을 향해 오르기 시작했다. 뛰듯이 걸었다. 머리 위가 환했다. 내 삶을 지배하던 공포가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아니, 애초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느껴졌다. 쉬지 않고 올랐다. 땀이 비 오듯 흘렀다. 뭍으로 올라와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하는 생선 꼴이었다. 그래도 멈출 수 없었다. 내 속에서 무언가가 타오르는 것을 꺼야만 했다. 그 순간에는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정상으로 향하는 동안 그간 내가 조그만 방 안에서 만들어 냈던 허상과 공포를 사방으로 던져버렸다.
 산 정상에 다다랐다. 추위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산 아래에서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바위 위에 걸터앉아 태양이 떠오를 때까지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그맣고 빨간 불덩어리가 둥실 떠올라 삽시간에 커져 산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주위는 온통 검은 색이거나 짙은 파란색뿐이었는데, 갓 태어난 태양은 산 전체를 채색해 나갔다. 그제야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다. 내가 믿는 대로, 내가 바라는 대로 주어진 삶을 칠해나가는 것. 더 이상 아무 것도 두렵지 않았다. 애초에 두려워해야 할 것이 존재하지도 않았음을 알았다. 길고 지루한 꿈에서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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