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3.5만세운동의 배경= 병자수호조약(1876년)로부터 23년 후 1899년 5월 1일 군산이 개항됐다. 11년 후 한일합방(1910년)이 되었고, 그 여세로 인해 군산은 일본인 득세의 독점도시가 되고 말았다.
1914년 쌀 수출의 수송 증가로 전국 제1의 수출항이 되어 비극적인 일제의 쌀 착취 장소로 변해 버렸다. 1919년에는 한국인보다 일본인이 228명이나 더 살고 있는 일본인 도시화가 되었고, 1920년에는 일제 식민정책의 식량 및 원료 생산지로 평야지대를 끼고 있는 군산이 그 중심지가 됐다.
이러한 일제의 천시와 수모의 핍박 속에서 1892년 11월 3일 한국에 입국한 미국 남장로교 7인의 선교사들 중 전킨 (William McCleery Jun Kin/한국명 : 전위렴)선교사 부부와 의료선교사 드루(Dr. A.Damer Drew/한국명 : 유대모)선교사 부부의 *군산 선교스테이션이 충청도와 호남지역의 선교지 교두보로 궁멀(현 구암동)의 구암동산에 형성됐다.
그 규모나 조직면에서 외세에 대한 조직적 저항을 할 수 있는 여건들이 되어 있기에 이곳에서 교육을 받은 1세대들이 교사가 되어 교단을 지키며 나라사랑의 뿌리를 둔 항일항쟁이 시작됐다. 이는 ‘한강이남 최초의 군산3.5만세운동(1919년 3월 5일 거사)’ 을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

*군산 선교스테이션/Gunsan Missio ,m n Station : 구암동산을 중심으로 교회, 소학교, 영명 남학교, 멜본딘 여학교, 병원, 선교사 사택, 성경학당 및 각종숙소 등이 세워져서 군산의 신문화를 주도 하였고 군산근대문화의 발원지가 됐다.

▲군산3.5만세 운동의 전개= 호남지방의 3.1운동의 전개 과정은 주로 기독교와 천도교 계통으로 전송됐고, 군산은 당시 세브란스 의전생인 김병수 학생이 군산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를 통해 전송됐다.
군산은 호남지방에서 최초로 3.1운동이 일어났다. 특이할만한 사실은 주로 구암교회 신자와 미션스쿨이었던 영명학교, 멜본딘 여학교, 구암 예수병원 등 학생 및 직원들을 주축으로 3.1만세 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이다.
군산경찰서에서는 구암 스테이션을 3.1운동 이전부터 주요 감시대상으로 주목하고 있었으며, 학교교사들과 직원, 병원, 사무원들을 경찰서로 연행해 3~4일 사상과 신원조사를 한 후 내보냈다. 이 같은 왜경들의 간섭과 탄압 속에서 1919년(기미년) 독립선언의 외침은 예견된 거국 운동이자, 피 끓는 영명학도들의 민족애가 절정에 이른 대사건이었다.
군산의 3.5만세운동 전개 과정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당시의 박연세 교사와 김병수 학생을 거론하지 않으면 안된다. 영명학교 보통과, 고등과 특별과정을 마친 김병수는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의 추천을 받아 서울 세브란스 전문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김병수가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게 된 것은 세브란스병원 제약실에 근무하는 이갑성을 만나면서부터인데 그는 민족대표 33인의 한사람이었다. 이갑성은 김병수가 다른 학생들보다 민족심이 강하다는 것을 ㄷ알고 김병수에게 군산지방 연락책임자로 독립선언서 전달임무를 맡겼고, 김병수는 2월 19일 군산으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게 된다.
군산에 도착한 김병수는 2월 20일 영명학교 은사인 박연세를 만나 군산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다짐하고 자세한 거사일을 박연세와 계획하기에 이른다. 김병수는 서울에서 독립만세운동이 기독교와 천도교를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과 이갑성으로부터 받은 지시사항을 영명학교 교사인 박연세, 이수열, 고석주, 김수영, 송헌옥 등에게 전달했다.

▲군산3.5만세운동의 서막= 박연세는 만세운동이 차질없이 진행되고 치밀한 계획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는 3.1만세운동 적극가담 교사들과 자주 만나 세부실천 계획을 지시했으며, 학생인 김영후와 송기옥에게 거사에 필요한 태극기 제작을 부탁했다. 또한, 멜본딘 여학교 교사인 김영배를 만나 여학생들에게도 태극기를 만들 것을 부탁했다. 멜본딘 여학교에서는 은밀히 태극기를 그렸고, 영명학교 지하실에서는 독립선언문을 등사했다.
거사 준비가 끝나갈 무렵 박연세는 서울의 독립만세운동 일시를 사전에 김병수로부터 전해들은 바 군산의 거사일과 장소를 놓고 고심했으며, 당시 군산의 장날인 3월 6일로 결정했다. 평소보다 많은 군중을 쉽게 모을 수 있다는 의견이 반영된 날짜였다.
그러나 거사 전날인 3월 5일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다. 거사의 낌새를 눈치 챈 외경 10여명이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를 급습해 학교 건물 안을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일로 등사기와 태극기, 독립만세운동과 관련된 각종 문서 등이 그들에게 발각됐고, 주모자 격으로 박연세와 이두열 교사가 수갑이 채워진 쳐 끌려갔다. 두 교사가 강제로 연행되어 가는 모습을 보고 있던 학생들과 예수병원 직원들은 그 모 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즈음 그들 가운데 누군가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교사들, 고학생, 병원 직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일제히 태극기를 꺼내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가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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