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간격

오피니언l승인2019.02.27l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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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 국민연금공단
 
 
설 명절날 고향 뒷산에 올랐다. 뒷산이라고 하지만 소백산맥 중턱이라 골짜기가 꽤나 깊다. 사람이 별로 찾지 않는 산이라 숲이 무성하다. 이런 숲을 지날 때마다 늘 자연의 오묘함을 느낀다. 나무들 간의 적당한 간격 때문이다. 멀리서 보면 하나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숲의 나무들은 적당한 간격을 두고 자라고 있다. 인공적으로 조성한 숲이 아닌데도 아름다운 간격이 있다. 그 간격 사이로 바람이 통해서인지 도시의 나무들보다 푸르름이 짙고 껍질도 단단해 보인다. 이러한 숲의 간격을 어느 수필가는 ‘아름다운 간격’이라고 하였다.
 사람 사는 이치는 숲의 나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숲의 나무처럼 사람 간에도 적당한 간격이 필요하다. 부부간에, 부자간에, 친구간에도 간격이 있어야 한다. 간격이 없어야 할 것 같은 부부도 삼강오륜에서 부부유별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나무의 간격은 우리에게는 서로의 존중과 같다. 간격은 다가설 수 없는 벽이 아니라 존중의 통로이다. 언제든 필요할 때 다가가고 물러설 수 있는 간격이 있어야만 오래도록 사이좋게 지낼 수 있으리라. 숲에서 나무가 어울려 살아가는 것처럼 우리는 이웃과 어울려 살아가고 있다. 매일 만나는 가족, 친구, 직장동료가 간격이 필요한 숲의 나무와 마찬가지인 셈이다.
 나는 가족들과 있을 때 가끔 간격이 필요함을 느낀다. 아버지라는 이유로, 남편이라는 이유로 존중보다 주장만 할 때가 많다. 가족들이 어떤 마음인지 생각하지 않고 말을 쉽게 내 뱉는다. 결혼 적령기가 된 큰애에게 결혼 얘기를 하면 당장 결혼생각이 없으니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고, 취업준비생인 둘째는 나보다도 더욱 자신의 취업에 목말라 할 것이다. 재수생인 막내 역시 표현하지는 않지만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을 것이다. 자신이 낳은 자녀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니 관계 관리의 중요성은 알고 있지만, 아이들만 보면 관계 관리의 중요성을 쉽게 잊어버린다. 그럴 때마다 가족의 대변자인 아내로부터 핀잔을 듣고서야 반성을 하게 된다.
 20년 전쯤, 아름다운 간격을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운 기억이 있다. 그들과는 친구로 지냈다. 동년배라 퇴근 후에 자주 어울리곤 했었다. 그들 중에 아주 절친인 두 사람이 있었는데 그들의 우정을 다른 친구들이 시샘할 정도였다. 어느 날부터 두 사람은 의기투합하여 같이 자취를 했다. 비용도 적게 들어가고 우정도 쌓을 수 있는 방법으로 동거를 하게 되었다.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도 함께 지내면 마음이 맞지 않아 다투기도 하는데 남남간의 동거는 쉽지 않았을 터이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한 달만 함께 지내면 사이가 멀어진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느꼈다. 그들의 동거는 한 달을 넘기지 못했다. 불편함을 견디다 못해 한 친구가 셋방을 얻으면서 동거는 끝났다. 동거의 끝은 좋지 않았다. 평소 그렇게 다정했던 친구가 주벽이 심했다. 술에 취하는 날에는 우정이 쌓는 것이 아니라 미움만 쌓는 꼴이 되어 버렸다. 잦은 폭행이 있었고 성격이 전혀 맞지 않았다. 존중이란 간격을 두고 본 친구와 간격 없이 겪은 친구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그들은 폭행죄로 고소하는 지경까지 이르렀고 서로의 직장에 민원까지 넣으면서 극단적인 상황까지 가게 되었다. 결국 한 친구는 오랫동안 다녔던 직장까지 그만두게 되었다.
 그들에게 간격이 있었으면 어떠하였을까. 서로를 존중해주고 배려해 주었더라면 어떠했을까.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을 생각하면 많은 아쉬움이 남는다.
 뒷산 골짜기 나무사이로 걷는다. 적당한 간격이 눈에 들어온다. 나무 기둥을 잡아 보았다. 간격의 여유를 깨닫고 다가간 나무가 대견스럽고 아름답다. 이 아름다움은 꾸며서가 아니라 숲에서 우러나온다. 나무를 당겨 가만히 귀를 대 본다. 다정스런 존중의 소리가 바람을 타고 온다. 아직도 이웃 사람을 사귀지 못해 외로워진 이들이나 자신의 욕심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면, 숲에서 가끔 쉬어가면 어떨까 싶다. 매서운 겨울인데도 간격의 미학을 지켜온 숲이 오늘따라 유난히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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