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만세운동 발발= 박연세, 이두열 두 교사가 연행됨으로써 거사의 계획은 자칫 수포로 돌아갈 지도 모르는 일 이었다. 그러나 김윤실 교사가 나머지 교사와 학생들을 소집해 긴급회의를 가졌고, 그 결과 거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기 전에 하루 앞당겨 이날 5일에 독립만세운동을 벌이자고 결의했다.
긴급회의를 마친 이들은 예수병원 직원과 영명학교 교사 20여명, 학생 100여명, 멜본딘 여학생 140여명 가량이 영명학교 운동장에 모였다. 그리고 곧바로 전세종, 양기철, 송기옥, 이도준, 홍천경, 고준명, 유복섭, 오한길, 강규언, 강인성 등 영명학교 학생들은 그간 극비리에 제작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 줬다.
이어 교사들이 ‘대한독립만세’ 선창이 있자 모인 사람들 모두 한목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따라 외쳤다. 영명학교 운동장에 ‘만세’를 외친 이들은 손에 쥔 태극기를 흔들며 지금의 중앙로 쪽을 향해 밀고 나갔다. 영명학교에서 출발한 ‘만세운동’ 대열이 설애 근처에 이르자 이곳에 있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순식간에 대열은 많은 인파로 늘어났다.
이들의 발길은 어느새 군산경찰서 방면을 향해 다가가고, 곳곳에는 독립선언서가 뿌려졌다. ‘독립만세’를 외치는 사람의 수는 어느새 500여명 이상으로 불어났으며, 점차 그 수는 증가돼 군산은 ‘독립만세운동’의 물결에 휩싸여 갔다. ‘독립만세운동’ 대열이 이윽고 군산경찰서 앞에 측정하기 어려울 만큼 다다르자 왜경들은 당황하는 빛을 감추지 못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독립만세를 외치는 군중들의 수가 증가하자 일본 경찰은 익산 헌병대에 지원을 요청했다. 급파된 익산 헌병대와 왜경들은 군중들의 기미가 수그러지지 않고 오히려 강경하게 맞서자 앞장 대열에 선 군중에게 무자비한 사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앞 대열에 있던 3~4명이 총에 맞아 쓰러지자 무방비 상태인 군중들은 그들의 무력진압에 만세대열이 뒤에서부터 흐트러지기 시작하며 골목 등 곳곳으로 흩어졌다.
이때 만세운동 현장에서 검거되거나 체포된 사람은 고석주, 홍정헌, 양성도, 안경태 등 모두 90여명으로 군산경찰서 유치장에 투옥됐다.
또, 헌병대와 왜경들은 구암동에 소재한 영명학교와 멜본딘 여학교를 수색해 독립선언문 2000장과 독립운동에 관련된 문서를 압수했으며, 학교의 기물을 부쉈다. 이 사건으로 영명학교와 멜볼딘 여학교의 수업은 일시 중단됐으며, 두 학교의 교사들은 만세운동과 관계가 있든 없던 모두 연행되어 며칠씩 심문을 받는 고충을 당했다. 구암예수병원 직원들도 전원이 구속됨으로써 병원운영이 마비가 됐으며, 패터슨 원장은 1924년 왜경들로부터 많은 압력을 받고 구암예수병원을 떠났다.

▲3.5만세운동의 영향= 1919년 3월1일 서울에서 시작된 3.1운동은 북부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남부지방에서는 5일부터 봉기했는데, 그 최초 봉기가 3월5일 군산의 영명학교였다. 오는 호남지방은 물론 한강 이남에서도 최초로 일어난 봉기이다. 광주와 전주는 이보다 늦은 각각 11일과 13일이었다.
군산의 3.5독립만세운동은 전북 전 지역으로 확산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군산 시위 이후 임실(3월 12일), 전주(3월 13일), 청웅(3월 15일), 정읍(3월 16일), 김제(3월 21일), 신태인(3월 21일), 삼례(3월 23일), 오수(3월 23일), 남원(3월 23일), 산서(3월 23일), 진안(3월 25일), 장수(3월 26일), 무주(4월 1일), 옥구(4월 1일) 등지에서 지속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4월 들어서면서 그 열기는 더욱 고조됐다. 익산 4.4만세 운동은 영명학교 문용기 교사 등이 중심이 돼 일으킨 것이었다.
군산의 만세운동은 3월부터 5월까지 군산시내에서 총 21회 발생됐으며, 2만5800여명이 참가해 피살자 21명, 부상자 37명, 145명이 투옥됐다. 총 7회의 만세운동이 일어난 옥구는 5700명이 참가했으며, 사상자 32명, 부상자 35명, 50명이 투옥됐다.
만세운동의 결과로 주모자였던 이두열은 징역 3년에 김수영, 박연세는 징역 2년 6개월, 고석주, 김성은, 유희성은 1년 6개월의 징역형에 처해졌고, 영명학교 학생 30여명은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아 복역했다.
군산 3.5독립만세운동은 미국교포신문인 ‘신한민보(1919.7.21)’에 실렸다. ‘신한민보’는 ‘군산 영명학교 전체가 활동’ 이라는 제목에 ‘두령자 12인이 체포되어’ 라는 부제로 활약상을 소개했다. 당시 기사에는 “동방 오하요주 모씨의 통신을 거한 즉 거월에 우리 본국 전라북도 군산으로부터 미주 동방 조지아주에 도착한 백인 린촌(선교사)씨의 통신에 일렀으되, 대한 독립선언 이후에 군산 영명학교에서는 학생 전체와 교사 전체가 다 나가 독립시위 운동을 떨치다가 왜적 병정에게 피착됐다”고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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