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의 교통요지인 이리(현 익산)에서는 1919년 3월26일 많은 민중들이 일본경찰의 감시를 피해 목포행 열차의 승객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벌였다.

일본군 보병 4연대의 1개 중대가 이리에 주둔하며 경찰과 함께 전주와 군산, 익산 방면의 왕래를 일일이 감시하면서 만세운동은 매우 어려운 상황이였다.

그러나 오산면 관음마을에 살며 남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문용기는 기독교 계통의 박도현과 장경춘 등의 인사들과 비밀리에 만나 사전계획을 수립하고 교통이 번잡한 이리에서 만세운동을 펼쳤다.

영명학교 교사였던 문용기는 이어 그해 4월4일 이리 장날에 300여명의 군중들과 함께 시가행진하면서 익산 3.1만세운동을 실시했으며 길가던 군중들도 함께 참여하며 시위군중은 1천여명으로 늘어났다.

이날 시위에는 서울에서 유학하다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귀향한 중등학교 학생 김종현, 김철환, 이시웅, 박영문 등의 청소년 학생들과 전북지역에서 활동하던 서울의전 학생 김병수 등도 포함됐다.

이리지역은 적의 헌병과 보병 부대가 주재하면서 전북도내 만세운동을 강압하는 지역으로 이날 만세운동은 적지의 중심부에서 전개된 주목받은 운동으로 독립만세운동의 우렁찬 함성은 전국으로 크게 확산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에 일본 군인과 경찰들은 소방대원과 일본인 농장인 대교농장 직원들을 동원하며 시위군중들에게 무차별로 총격을 실시하고 참검과 곤봉, 갈고리 등으로 무차별 폭행을 실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문용기 열사는 당당한 모습으로 연단에 올라 오른손에 태극기를 들고 독립운동의 정당성과 일제의 만행을 앞장서서 규탄하는 연설을 실시하는 자랑스런 행동을 보여줬다.

그러자 일본군은 총검을 휘둘러 태극기를 든 문용기 열사의 오른팔을 내려치자 팔과 함께 태극기가 땅에 떨어지자 아픔도 잊은채 왼손으로 다시 태극기를 주워들고 만세운동을 실시했다.

일본군은 또다시 검으로 왼팔을 내려치는 악독함을 실시해 문용기 열사는 두팔을 모두 잃어버리는 아픔을 겪게 됐다. 그는 두팔을 모두 잃은 몸으로 다시 일어서며 군중들과 함께 만세, 만세의 함성을 지르자 일본군은 다시 그의 가슴을 찌르고 배를 가르는 잔인함을 보여주었고, 문용기 열사는 땅바닥에 쓰러지면서도 대한독립만세 함성을 질렀으며, 숨이 멈추는 순간까지도 독립을 향한 외침은 멈추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이날 이리에서 열린 만세운동에서는 문용기 열사를 비롯 박도현, 장경춘, 박영문, 서공유, 이충규 등도 순절했으며 김병수 등 10여명은 부상, 만세운동에 참여한 많은 군중들도 구속당했다.

그러나 만세운동에 참여한 청년들과 군중들의 기개는 꺾이지 않고 다음날인 5일에는 여러곳의 산상에서 다시 봉화와 함께 횃불 만세시위가 펼쳐졌다.

특히 함열면 산상에서는 독립만세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기 위해 충청도 강경지역을 연결하며 수차례에 걸친 횃불 만세시위는 일대 장관을 이루기도 했다.

여기에 8일에는 용안면 화배리에서 청년 박영문, 김기동, 차팔용, 최팔만과 14세 소년 김귀동이 주동이 되어 산상에 올라가 수차례에 걸친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해 일본군을 놀라게하기도 했다.

당초 이리와 익산군 내에서 펼쳐진 독립만세운동은 몇몇의 주민과 학생들이 실시하면서 체계 없이 이루어지는 산발적인 운동이였다. 3월10일 예정일인 만세운동이 전개되기 전에 박영진, 정대원, 고총권 등 일부 인사가 독립선언서 배포 등의 비밀활동을 실시하다 일본 경찰에 발각되면서 계획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천도교에서 실시한 제1세 교주의 추도식이 끝나고 오후 9시경 군내 여러곳의 산상에서 횃불이 오르고 많은 부락에서 만세의 함성이 메아리 쳤다.

여산면에서는 이정, 박사국, 이병석 등의 유지들이 원수리의 정영모 집에서 모여 독립운동의 확산을 강조하고 ‘조선 자주독립’을 내용으로 쓴 깃발을 들고 여산면 헌병 분견소 남쪽에서 2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의 우렁찬 함성을 울리며 민족의 지개를 일본군에게 보여줬다.

금마면에서는 장날을 이용해 3월18일과 28일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18일에는 왕궁면에 사는 김광덕, 송종석 등은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협의하고 친지들에게도 연락, 오후 1시경 금마시장에서 친지들과 앞장서서 대한독립만세를 소리높여 부르자 수많은 군중들이 호응하고 모두가 만세를 외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28일에는 춘포면 청년 소진석 등이 주동이 되어 수백명의 장꾼들 앞에서 “조선사람으로서 독립을 원치않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며 독립을 경축하는 만세를 외치자 모든 군중들이 소리를 모아 만세를 외쳤으며 소진석은 검거됐다.

이같은 만세운동으로 김광석, 송중석, 이정, 박사국, 이병석, 김치옥 등은 광주고등법원 전주지청에서 1년에서 1년반의 징역을 받았고 김치옥은 고등법원에서도 만세운동의 무죄를 주장하며 독립만세운동의 정당성을 끝까지 강조했다.

/익산=김종순기자.s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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