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석현 한국전기안전공사 홍보실 
 
 한 여인이 있다. 가족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온 여인이 있다. 여인이 생계를 위해 달려오느라 자기 자신을 돌보지 못한 것을 벌한 것일까, 하늘은 암이라는 죄명을 선고하였다. 항소조차 할 수 없는 야속한 병마를 내려 받은 그 여인은 우리 이모이다.
이모는 인생의 모진 풍파를 겪었다. 알콜중독인 남편과의 삶의 투쟁에서 꿋꿋이 버티고 살아남아 건장한 두 아들을 키워낸 인생의 베테랑이다. 혼자 먹고 살기에도 바쁜 요즘 세상에서 이모는 다른 식구들의 대소사를 챙기며 경제적인 도움까지 주었다. 이모는 ‘아낌없이 주는 나무’와 같은 존재였다. 그런 이모는 할머니의 자랑이자 동생들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일찍 남편을 일찍 떠나보낸 외할머니에게는 이모가 남편같은 보호자였다.
 모진 풍파 속에 당당했던 이모가 갑자기 쓰러졌다. 뇌졸중이었다. 다행히 즉시 병원에 이송되어 의식을 찾았지만 그게 끝은 아니었다. 나쁜 일은 항상 겹쳐서 온다는 인생의 법칙이라도 있는 것일까. 이모는 대장암 진단을 받았다.
 외할머니는 아직 이모가 암에 걸려 수술을 받은 걸 모른다. 평소 외할머니는 자식과 가족을 위해 억척스럽게 살아온 이모를 많이 안쓰러워했다. 그래서일까. 어느 누구도 선뜻 이모의 소식을 외할머니에게 전하지 못했다. 모든 가족은 이모의 투병사실이 비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영원한 비밀이란 없다고 했지만 할머니에게는 이모의 투병소식은 영원한 비밀이 되었으면 좋겠다. 가족들은 할머니가 사실을 알게 되는 날이 두렵다. 만약 이모의 소식을 알게 된다면 충격을 고령의 외할머니가 감당하실 수가 없을 것이다. 모든 것이 나중에 밝혀져 많은 원망을 듣더라도, 지금 이순간은 비밀을 만들 수밖에 없다.
 이모의 삶은 희생 그 차체였다. 오로지 가족을 위한 삶이었다. 명품가방 하나 산 적도 없고, 남들이 다 가는 해외여행 한번 다녀온 적이 없다. 자신을 위해 작은 것조차도 해 본적이 없는 이모는 지금 생사를 넘나들고 있다.
 이모의 희생을 보면서 우리 시대의 어머니들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이모의 삶은 우리네 어머니들의 삶과 같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본인의 모든 것을 희생하시는 어머니. 본인들은 힘들지라도 자식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마지막 남는 것까지도 내어 주시는 어머니. 우리 시대의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순교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가끔 우리 어머니들의 숭고한 삶을 보면서 자신을 위해 살아보면 어떨까. 자아실현을 위해 인생을 할애한다면 조금은 더 행복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한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나 역시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자녀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우리 어머니들과 같이 희생을 기꺼이 자처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의 인생을 보며 한편으로는 슬퍼지기도 한다. 인생이라는 연극은 죽음이란 막이 내리면 끝이다. 누군가가 울어준다고 앵콜 공연을 해주지 않는다. 연극의 평점이 높다고 해서 그것을 다시 볼 수 없다.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죽음인 것이다. 찬란하게 빛나던 인생들도 죽음이란 어두운 장막 뒤에선 그 빛을 잃어버린다. 삶이란 죽음이라는 마침표가 있어 아름답다고 하지만 마침표를 찍고 난 뒤 남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을 해 보게 된다.
 지나간 자리는 흔적이 남는다. 봄바람이 지나간 자리에는 새싹이 나고, 사람이 지나간 자리도 그 사람의 기억이 흔적으로 남는다. 이모가 지나간 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많은 흔적이 있다. 나의 가슴에 우리 가족의 가슴에 따스한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오래오래 기억될 것이다.
 나도 언젠가는 인생의 촛불이 꺼져가는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가 노란 개나리가 피는 따스한 봄이었음 좋겠다. 죽음은 차가운 어둠으로 찾아오지만 사람이 지나간 아름다운 흔적은 따뜻할 것이다. 나도 이모처럼 우리시대의 어머니처럼 아이에게 가족에게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고 싶다. 봄날처럼 따스한 흔적을 남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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