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오피니언l승인2019.03.20l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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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근식 국민연금공단 
 
퇴근길에 아내가 마중을 나왔다. 전주에서 두 시간을 달려 온 대구는 봄비에 흠뻑 젖었다. 귀가길을 마중 나온 아내가 고맙다. 그런데 아내는 평소와는 달리 표정이 밝았다. 비오는 날 마중 나오는 일이 귀찮을 터인데 불만이 전혀 없는 표정이다. 승용차에서는 아예 비음을 섞어 가며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곰 같은 사람이 갑자기 여우로 변신을 한 이유가 부담스러워 의자를 젖히고 눈을 감았다.
 결혼생활 30년이 지난 지금, 아내의 표정만 봐도 이유를 안다. 오늘처럼 여우처럼 변신을 하게 되는 날에는 어려운 부탁이 있고, 나를 본 척도 하지 않는 날에는 서운한 일이 있다는 뜻이다. 전화로 별다른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어 아내의 태도가 바뀐 이유가 궁금했다. 생활비는 봉급 통장은 자기가 관리하니 돈이 필요한 것은 아닐 테고, 부모님 때문에 애교를 부릴 이유는 더더욱 없다. 알아서 이야기를 하겠지 하며 곁눈질로 아내를 슬쩍 보았다. 여전히 표정히 밝았다.
 아내는 요즘 평생교육원에서 자격증 공부를 한다. 두 달 전, 아내는 뜬금없이 자격증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운전면허증도 내 잔소리로 취득했던 아내다. 설마 하는 생각에 잘 할 수 있을 거라는 칭찬을 해주었더니 덜컥 수십만을 들여 평생교육원 강좌에 등록을 하고 만 것이다.
 여우로 변신한 이유를 실토했다. 내일이 중간고시 시험 마감이란다. 시험 치는데 도와달라는 것이다. 내 전공과목이 아닌데 직장생활만 한 내가 무엇을 도와 줄 수 있을까? 전공과목이라도 지금 나이에 기억하는 것이 이상한 일인데. 그렇다고 나를 믿고 부탁하는데 싫다고 할 수가 없다. 여우같이 밝은 표정이 내 기분까지 좋게 하여 흔쾌히 승낙을 할 수 밖에 없었다. 
 내가 승낙을 하자마자 아내는 인터넷에서 시험을 클릭해 버렸다. 어려웠다. 대부분 처음 보는 문제였다. 그런데 아내는 제법 문제를 풀어나갔다. 어쩌다 내가 아는 문제가 나오면 아내가 정답을 확인한 뒤였다. 그런데 아내는 막히면 내게 묻는다. 꼭 어려운 문제만 묻는다. 그때마다 ‘아 이거 3번이야. 3번 그거 1번’ 큰소리로 답을 알려 주긴 했지만 솔직히 모르는 문제였다. 아내는 내가 말한 정답을 체크한 후 다음 문제를 풀어 나갔다.
 평생교육원 강좌는 합격선이 60점 정도이다. 리포트, 토론은 기본으로 점수를 받으면 시험성적은 40점 정도만 해도 학점을 받을 수 있다. 아내가 정답을 많이 알고 있으니 내가 가르쳐 준 문제가 몇 개 틀린다고 해도 문제되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시험 결과는 한 달 뒤에 나온다고 하니 자신 있게 아내를 도와 줄 수 있었다.
 열심히 도와 준 덕분에 시험은 마쳤다. 아내는 내 도움 덕분에 힘든 숙제를 했다며 흡족해 한다. 차를 한잔 주겠다며 주방으로 가는 아내의 뒷모습을 보면서 도왔다는 뿌듯함보다 혹시 나 때문에 학점을 날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되었다. 아예 모른다고 할 걸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지난 일이니 내가 찍은 문제 중에 몇 문제라도 맞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다. 
 아내는 가끔 능구렁이다. 마음을 숨기고 능청스럽게 행동할 때가 많다. 지난달에 신용카드를 많이 썼다. 친구들과 술을 먹다가 내가 술값을 지불했다. 친구들이 일부를 돌려줘 크게 부담이 되지는 않았지만 신용카드 사용내역서에는 금액이 제법 크게 찍혔다. 아내가 모를 리가 없다. 거실에 있는 신용카드 통지서에 술집에서 청구한 금액에 빨간 볼펜으로 표시까지 해 두었지만 결국 묻지 않아 실토하고 말았다. 아마 오늘도 그렇지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시험을 칠 때 문제도 읽지 않고 큰 소리를 치는 내게 믿음이 가지는 않았을 터인데, 어찌 내가 말하는 답을 믿고 넘어갔을까? 아내가 내게 모른다며 물었던 문제 중에는 분명 자신이 알고 있는 답을 시험하기도 했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자 갑자기 능구렁이 같은 아내가 얄미워진다. 틀리면 틀렸다고 얘기를 했다면 지금의 기분은 아닐 텐데.
 아내가 차와 과일을 가져왔다. 수고했다며 내게 격려를 하며 여우같은 애교를 부린다. 힘든 직장생활에서 벗어나 아내의 밝은 모습을 보니 기분이 절로 좋아졌다. 평소 아내는 미소는 내게 평화를 주었지만 오늘의 미소는 내게 믿음과 배려감을 준다. 그런 믿음과 배려가 있었기에 내가 지금의 작은 자리 정도라도 지키는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아내가 새롭게 보인다. 오늘따라 유난히 웃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그녀는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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