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관광지를 보면 각각의 특징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재미가 있다. 그렇지만 서로 연계성을 가지고 있는 곳은 관련된 이야기를 알고 들여다보면 그 재미가 두 배로 된다.
군산에는 진포대첩을 기념해서 만든 진포해양공원이 있는데 군산에서 일어난 진포대첩은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익산, 충청도, 경상도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 역사적 사실이다. 그 이후에는 다시 남원으로 이어져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전주 한옥마을에 있는 오목대 이야기로 연결된다. 여행을 하면서 한 곳만 보는 것보다 장소와 관련된 곳을 함께 보면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는 만큼 진포대첩 이야기를 따라 역사기행을 떠나보자.
△군산 진포해양공원과 진포대첩
군산 근대역사박물관 옆에는 진포해양공원이 위치해 있다. 군산의 자랑인 진포대첩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공원으로 당시 진포대첩 전투 현장이었던 곳이라서 더 큰 의미가 있다. 공원에는 야외 전시장과 군함을 이용해 만든 실내 전시장으로 구성돼 있다.
야외 전시장에는 육·해·공군에서 퇴역한 장비 13종 16대가 전시돼 있는데 커다란 배, 비행기, 자주포 등은 어린이들의 체험 학습장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 외에도 바닷가 쪽에는 진포대첩을 상징하는 작은 화포가 나란히 전시되어 있어 공원을 찾는 이들의 관심을 끌고 있다.
공원 안에는 해군 상륙함인 위봉함 676호(퇴역 군함)를 이용한 진포대첩 기념관이 눈길을 끈다.
위봉함은 1945년 건조된 군함으로 미 해군이 14년간 사용하면서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상륙 작전 등에 참전해왔다. 이후 1959년 한국 해군에서 인수해 월남전 참전 등 많은 활동을 하다 2006년에 퇴역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산시에서는 역사교육 학습장과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위봉함을 2007년 이곳으로 옮겨 놓아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기념관 안에는 진포대첩에 관련된 자료들이 전시돼 있고 그 외에도 세계 해전, 한국 전쟁, 생태 자료는 물론 해군의 함 내 생활환경을 볼 수 있게 되어 있다.
특히 진포대첩 당시의 이야기가 상세하게 정리돼 있는데 요약해 보면 이렇다. 삼국시대부터 이어온 왜구 침략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매우 심해진다. 특히 고려 제38대 공민왕(재위 1351~1374) 때에는 14년간 무려 378회나 침략하여 강화도가 약탈당하고 개경까지 위협을 당하게 된다. 이후 왜구 침략은 규모도 커지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식량, 문화재를 약탈하고 나아가 납치와 방화를 일삼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고려 우왕 (재위 1374~1388) 1380년에는 왜구가 5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금강 하구인 진포(鎭浦)에 침입하는데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그들은 큰 밧줄로 배를 서로 연결해 묶어 두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한 다음 연안에 상륙하여 주변의 고을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왜구를 진압하기 위해서 나세(羅世)를 상원수로,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로 하여 전함 1백 척을 거느리고 진포에서 왜구를 공략하게 된다. 이때 최무선(崔茂宣)이 만든 화포(火砲)를 사용한 함포사격을 통해 왜구의 배를 불태워 승리를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진포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처음으로 화포(火砲)를 사용한 역사적인 전투였으며 진포해전의 승리로 오랫동안 고려를 괴롭혀 왔던 해적 집단인 왜구의 기세를 꺾어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해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진포대첩 현장, 익산 곰개나루
군산과 인접한 익산 웅포(熊浦, 곰개나루)에도 진포대첩 기념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당시에는 금강을 이용해서 웅포, 강경을 거쳐 공주 등지로 배가 다녔기 때문에 진포해전에 어떤 형식으로든 관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구들 배가 500여 척이나 되었기 때문에 금강 하구 좁은 지역에서만의 전투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여 지는 대목이다. 
왜구가 침입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식량을 약탈하는 것인데 그 때문에 조창(漕倉)이 있는 곳을 침략하게 된다. 진포대첩도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 고려 시대에는 13개의 조창을 운영했는데 그중 하나가 군산 금강 변에 있던 진성창이다. 왜구는 진성창에 있던 세곡을 약탈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침략한 것이다. 해전에서 대패한 왜구들은 퇴로가 차단돼 육지 깊숙한 곳으로 달아나면서 닥치는 대로 살인·약탈을 일삼았다.
△이성계의 남원 황산대첩
왜구의 일부는 옥천과 영동 쪽으로 일부는 상주와 선산, 금산 쪽으로 달아났다. 특히 상주 쪽으로 달아난 왜군의 주력 부대는 다시 성주를 거쳐 함양에서 고려 군사를 만나 싸워 이기게 된다. 이 전투에서 박수경, 배언 장수를 비롯한 아군 5백여 명이 전사했다. 기세가 오른 왜구들은 함양을 노략질하고 남원산성을 공격하게 된다. 왜구는 이 전투에서 실패하여 운봉현 인월역에서 진을 치고 북상을 준비하게 되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고려 조정에서는 이성계를 양광·전라·경상 삼도 순찰사(楊廣全羅慶尙三道巡察使)로 임명해 왜구를 전멸시키는데 성공한다. 이것이 바로 황산 대첩이다. 이성계는 황산 대첩의 승리로 명성을 얻게 되고 황산 대첩으로 진정한 진포대첩이 완성된다.
남원 운봉에는 황산에서 왜구를 크게 무찌른 업적을 기리기 위해 조선 선조 10년(1577)에 세운 황산대첩비가 있다. 비각은 현종 8년(1667)에 세운 뒤 고종 19년(1882) 다시 고쳐지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비문을 쪼아 대첩비를 파괴했고 1957년 비문을 다시 새겨 본래의 좌대에 세우고 1973년에는 보호각을 세운다. 
황산대첩 유적지 안에는 파비각(破碑閣)이 별도로 있는데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파괴한 황산대첩비를 보존한 곳이기도 하다.
파비각(破碑閣) 안에는 조선 선조 때 세웠던 황산대첩비가 누워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러 조각으로 파손돼 서 있을 수 없기 때문으로 조각난 비석 비문조차 손상시켜 글씨를 알아볼 수 없도록 만들었다. 누구나 안타까움을 느낄 수 밖에 순간. 국가가 힘이 없으면 반복해서 이런 수모를 당한다는 역사의 단순한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파비각(破碑閣) 반대쪽 끝에는 어휘각(御諱閣)이 있는데 어휘각(御諱閣)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황산대첩은 자신 혼자만의 공이라기 보다는 여러 사람의 공으로 큰 승리를 거뒀다는 성지를 석벽에 새긴 유적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글씨가 뚜렷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한민족 문화 말살 정책으로 전각을 폭파하고 철정으로 글씨를 쪼아버려 현재는 그 잔영만 남아있어 안타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다. 현재의 어휘각(御諱閣)은 1973년에 다시 세운 것이다.
△전주 한옥마을 오목대
전주 한옥마을 가까이에 있는 오목대(梧木臺,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는 이성계 장군이 남원 황산대첩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 승전을 자축하는 연회를 열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이런 축하연을 열었던 것은 오목대와 인접한 자만동마을에 이성계의 4대조 목조 이안사가 살았던 옛 터가 있었기 때문으로 이성계 장군은 조선을 개국한 후에 이곳에 정자를 짓고 이름을 오목대(梧木臺)라고 했다고 알려져 있다.
오목대(梧木臺)와 자만동 마을은 원래 산자락이 연결돼 있었으나 전라선 철도(전주~남원 구간 1931년 개통) 공사를 하면서 단절돼 현재는 육교로 연결돼 있다. 자만동에는 이목대(梨木臺)가 있는데 이는 1900년 고종황제가 써서 내린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 비석을 보존한 곳이다. 자만동은 개발이 덜 되어 옛 모습을 간직한 골목길이 운치가 있는데 역사 기행에 잘 어울리는 투어 코스이기도 하다.  
△군산, 익산, 남원, 전주로 이어진 역사 기행
군산 진포해양공원에서 출발해서 익산 곰개나루를 거쳐 남원 운봉에 있는 황산대첩비를 보고 다시 전주로 올라와 한옥마을 오목대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해본다. 여행을 떠나기 전 명소와 관련한 역사 이야기를 찾아도 좋고 특별한 주제를 가지고 여행을 계획해보면 어떨까? 역사도 배우고 전북 여행에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김대연기자·red@/사진 및 자료제공=전북도청 전북의 재발견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