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는 날이다.

임시정부 수립 100번째의 숫자적 의미보다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단재 신채호 선생 말을 빌려 전북지역 독립 운동가들을 다시 기리는 기회를 가져본다.

이번엔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에 나섰던 전북지역 독립운동가들을 조명한다.

지난 199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 받은 박정석은 전북 남원 출신이다.

1919년 4월 4일 광한루 앞 광장에는 독립을 열망하는 수천명 군중들의 만세운동이 있었다.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중심으로 이뤄진 만세운동에 박정석도 함께했다.

하지만 일제가 시위주동자를 체포하기 시작하자 박정석은 일경의 추격을 피해 간신히 몸을 피하게 된다.

이후 박정석은 임시정부 군자금 모집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선다.

1920년 11월 19일 박정석은 박권영과 전주군 다가산 숲속에서 상해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을 모집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임시정부 특파위원장 명의로 ‘친일행동을 하고 이를 고치지 않으면 실혼몰적(失魂沒籍)할 것이며,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위하여 군자금을 제공해야한다’는 내용의 서신을 남원 유지들에게 보내 군자금을 마련했다.

마련한 군자금 140원을 임시정부로 보내는 등 모집활동을 이어가다 결국 일경에 붙잡혔다.

붙잡힌 박정석은 1921년 5월 9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징역 7년형을 받고 모진 옥고를 치르게 된다.

전북 익산 출신 소내원은 1919년 전국적으로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군산에서 일제에 항거하다 그해 9월 가산을 모두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임시정부가 있는 중국 상해로 떠났다.

마련한 자금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군자금으로 제공하고 정부요인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소내원은 당시 전라남북도 내에서 비밀연락망을 두고 국내정보와 군자금을 모집해 상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하지만 1921년 일제에 탄로 나면서, 사실상 조직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소내원은 서울 계림학원에서 강사로 재직하면서 초지일관 독립운동을 위해 기회를 찾다가 비밀리 국내외 독립운동 활동을 했다.

일경의 지독한 감시로 인해 소내원은 신변에 불안을 느껴 중국 동삼성으로 피신해 10여년의 떠돌이 생활을 보내게 된다.

장기간의 떠돌이 생활로 병을 얻게 된 소내원은 1931년 고향에 돌아왔으나 일제의 감시하에 자유를 구속받으며 지내게 된다.

그는 1992년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에 추서됐다.

이처럼 전북출신 임시정부 활동에 참여한 이들은 고판홍, 김일두, 나용균, 노진룡, 소진형, 송강선, 윤건중, 이재환, 최태경, 황의춘, 황종관, 박정석, 소내원 등을 포함해 13명의 독립유공자가 있다.

역사 교과서 한줄 남짓에도 남아있지 않는 이름들이지만,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라는 시간보다 나라의 독립을 위해 희생한 이들의 이름이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한편, 광복회전북지회는 11일 오전 10시에 전통문화연수원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기념식을 개최한다./김용기자·km4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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