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수초등학교 초등학생들의 만세운동

1919년 3월 2일부로 임실지역에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계획했지만, 김영원, 한영태 등 천도교 임실교구장을 지낸 두 지도자가 일본경찰에 체포되면서 초반 기세가 꺽이는 듯했다. 그러나 3월 10일 오수공립보통학교(오수초등학교) 학생들이 오전 10시경 쉬는 시간 이 되자, 운동장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당시 이 학교 교사였던 이광수(李光壽, 1896~1948)는 3·1운동 소식을 듣고 상경하여 손병희(孫秉熙) 선생과 만난 후 돌아와 독립선언서를 곳곳에 전달하고 서울에서 학생들의 만세시위 상황을 전하였던 것이다. 이광수 선생을 비롯한 수십 학생들의 만세시위는 교장의 설득에 의해 해산되었지만, 3월 12일 오전 10시 임실읍내에서는 수백명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하다가 해산하였고, 오후 9시에도 천여 명이 만세운동을 했다. 뒷산에 올라가 봉화를 들고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경찰이 산으로 오면 읍내에서 만세를 부르고, 다시 읍내로 내려오면 산에서 만세를 부르는 등 밤새도록 만세운동이 진행됐다. 이렇게 오수초등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와 임실읍내의 만세시위는 이후 청웅면 주민들의 만세시위, 지사면 주민들의 만세시위로 이어지는 등 임실지역 3.1 만세운동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뜨거운 오수 3.23 만세운동

3월 10일 오수초등학교 학생들이 3.1독립만세운동을 벌인 후 12일에는 임실읍 3.12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기세는 3월 23일 오수 장날을 기해 소위 3.23 오수 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그 중심지가 구 오수장터에 있는 원동산이다. 당시 오수장은 삼팔장이라고 하여 3일과 8일에 장이 서던 곳이었다. 장날은 사람과 사람이 모이는 곳이자 정보가 유통되고, 물산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3.23 오수 만세운동을 시작하였던 원동산에는 그 날의 함성을 기억할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다만 1939년 오수의용소방대원들이 상리마을에서 옮겨 온 오수의견비(도 민속문화재 1호)가 위치하고 있을 뿐이다.

당시 이기송(李起松, 1888~1939), 오병용(吳秉鎔, 1881~1967) 이만의(李萬儀), 이병열, 김일봉 선생의 주도아래 일어난 3.23 만세운동은 이튿날인 24일까지 이어졌다. 당일 오후 2시에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당시 이기송 선생은 “우리 조선이 독립국이었는데, 10여년 전에 일본에 합병당하였으니 2,000만 우리 국민 모두가 합심해야 한다”라고 연설하였다. 이 만세운동을 재빠르게 알아챈 일본경찰이 탄압하여 이기송을 경찰 주재소로 압송해갔다. 하지만 오병용, 이병열, 이만의, 김일봉 등이 지속적으로 만세운동을 유지하였고, 만세운동 대열은 800여 명으로 증가하였다. 그중 80여 명은 주재소로 들어가 ‘이기송을 석방하라’고 크게 외쳤으며, 일본인 순사 무라카미(村上)는 두려워하며 이기송을 풀어준다. 이러한 쾌거 이후 만세운동 대열은 2,000여 명으로 불어났고, 대열은 시장에 들어가 철시하고, 일본인 상점을 파괴시키기에 이른다. 또 면사무소로 이동해 면사무소를 포위하고 면장, 면서기에게 ‘대한독립만세’ 운동 대열에 참여할 것을 권고하였고, 그들은 만세운동 대열에 합류한다. 오수 주재소로 움직여 주재소 안에 직접 들어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주재소 유치장을 부수어 구금된 사람들을 석방한다. 이때 순사보(巡査補) 고택기(高宅基)가 주재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조준하자 분위기가 험악해졌지만, 만세운동 참여자들이 고택기의 총을 빼앗고 함께 만세운동을 하자고 요구하여 참여시켰다. 주재소 내부의 일본경찰들은 많은 사람들이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자, 우왕좌왕하는 상태에 빠진다. 이에 오수는 저녁까지 일시적으로 해방된 상태에 이른다. 하지만 그날 저녁, 오수의 지원요청으로 남원 헌병분대와 임실경찰서의 무장대가 오수로 출동하여 발포하였고, 만세운동 대열은 사상자를 내면서 버티지 못하고 결국 해산된다. 하지만 밤에도 계속적으로 이어져 3~4백여 명이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며 만세운동을 산발적으로 일으켰으며, 다음 날 아침에야 진정되었다. 이 운동에서 오수면의 이기송, 이윤의(李倫儀), 이주의(李注儀), 이희열(李熙悅), 오병용, 이병열, 이만의, 이기우(李起隅), 김용식(金容湜), 하용기(河龍基), 삼계면 허섭(許燮), 영광군 법성포의 양태환(梁太煥) 등이 검거되었다.

 

따뜻한 봄, 대한독립을 기다리는 영춘계(迎春契)

오수초등학교 3.10만세운동을 함께 하였던 이광수 선생은 그 후 비밀활동이 드러나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臨時政府)에 가담하다가 일본에 건너가 일본대학교 법과를 졸업하고 학생운동을 계속하다가 탄로되어 동경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귀국 후 이왕직(李王職) 예식과 전사(典事)를 역임하였다. 제자들과 뜻있는 인사들이 힘을 모아 현 오수초등학교 교정에 추모비를 세워 공을 기리고 있다.

최근 임실군청과 삼혁당 김영원선생 추모회에서 발간한 ??임실지역 3.1 운동 100주년 기념도록 영춘(迎春)??이 발간되면서 소개된 영춘계안(迎春契案)은 3.1운동 이후 오수사람들의 행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자료라고 할 수 있다. 영춘계는 1921년에 조직된 결사로 당시 35명이 가입하였다. 계원은 본관별로 전주이씨가 16명이고, 벽진이씨와 순천김씨가 각각 3명, 양천허씨와 현풍곽씨가 각각 2명, 그리고 경주김씨, 여산송씨, 창원정씨, 풍양조씨, 풍천노씨, 해주오씨, 행주기씨, 협천이씨가 각각 1명씩이며, 본관 미상의 박씨가 1명으로 전체 35명이다. 이중 순차적으로 독립유공자로 추서 받은 사람은 21명에 이르고 있으며, 곽병민, 곽병희, 김정업, 김종식, 김종윤, 김종창, 노유원, 오병용, 이기송, 이기우, 이만의, 이용의, 이윤의, 이재의, 이정우, 이정의, 이주의, 이하의, 이회근, 허근, 허섭 등이다.

당시 영춘계원이었던 이성기(李成器, 1890~?)씨가 1977년에 증언한 글에 의하면, “영춘계(迎春契)는 겉으로는 보통계와 같은 탈을 썼으나 춘(春, 왕손)을 맞는다는 뜻을 내포하여 춘풍추국(春風秋菊)에 모임을 갖고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한 비밀결사였습니다”라고 그 취지를 밝혔고, ‘출옥 순서로 규합하였기에 1~2년 후에 완전 조직되었고, 갑자~을축년까지 약4~5년간 존속되었으나 일본의 감시로 좌절되었습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치열했던 3.1 운동이 폭풍처럼 지나가고, 누구는 감옥에 갇혀햐 하는 신세가 되었고, 누구는 고문으로 동료를 팔아넘기지 않기 위해서 혀를 깨물고 옷을 찢어 목메달아 자결함으로써 절개를 지킨다. 그런데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따뜻한 봄을 기다리기 위해 밭을 갈고, 밤나무를 심고 그 뜻을 잃지 않기 위해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3.1 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꼭 100주년이 되는 2019년, 우리는 또 다른 시간을 걷는다. 일본강점기 나라 잃은 설움을 겪어야 했던 2,000만 동포는 5,000만이 되었고, 평화로운 시대에도 이러한 역사를 되새김으로써 우리가 경계할 일을 잊지 말아야 할 일이다. /임실=임은두기자 · led111@ /자료제공=임실군청 김철배 학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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