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 초상화와 전북지역

오피니언l승인2019.04.30l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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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희 어진박물관 관장


전주 경기전 내에 위치한 어진박물관에서 전통 초상화 특별전을 열고 있다. 전시 주제  “이렇게 뵙습니다”는 초상화를 통해 선현들을 만나본다는 의미이다.
우리나라 초상화는 크게 두 가지 특징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일호불사 변시타인(一毫不似 便是他人)’, 즉 ‘한 터럭이라도 다르면 그 사람이 아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전신사조(傳神寫照)’, ‘인물의 겉모습 만이 아니라 내면의 정신세계까지 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일호불사’의 기법은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그리는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태조 어진 용안에 사마귀가 그려진 것이 그것이다. 임진왜란 때 선조를 업고 임진강을 건넜다는, 호성 1등 공신 고희 초상화에는 얼굴에 천연두 자국이 그려져 있다. 윤두서 자화상에는 코구멍에서 삐져나온 몇 올의 코털까지 그려져 있다.
‘전신사조’를 중요하게 여긴 것은 외모와 함께 정신이 그 사람을 이루고 있고, 외형은 변해도 정신은 변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겉모습을 사실대로 그리면서 보이지 않는 내면의 정신세계를 담으려고 애를 썼다.
우리나라 전통 초상화들이 많이 제작된 것은 조선시대이다. 조상을 깍듯이 섬기는 성리학적 질서가 뿌리를 내리면서 초상화가 더 많이 제작 되었다. 우리가 어려운 시대를 살아왔음에도 초상화들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은 조상님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초상화는 하나의 그림 작품이 아니라 조상님 그 자체였다.
훼손되어서는 안되는 조상님이기에 피난 길에도 땅속 깊이 파묻어 두거나, 피난 보따리 안에 신주단지처럼 모시고 다녔다. 초상화의 접힌 자욱은 그 흔적이다. 전란이 일어나 왕의 초상, 어진이 피난하면 왕과 신료들이 그 앞에서 통곡하였다. 어진을 모신 진전에 불이 나면 소복을 입고 3일간 곡하였다. 어진은 임금 그 자체였다.
지금 남아 있는 초상화들의 대부분이 조상숭배 사상에서 비롯된, 사당과 서원 등에 봉안된 첨배용(瞻拜用)이다. 그래서 걸어놓는 괘축형 초상화가 압도적으로 많이 남아 있다. 경기전 태조어진도 매년 6차례 제를 지내는, 진전에 모신 영정이다.
전북지역은 초상화와 관련해 남다른 지역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국보 317호인 태조어진이 현존하고 있다. 조선건국자의 초상으로 유일하게 남은 진본이다. 경기전내 어진박물관은 이를 잘 보존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설립된 것이다.  
전북지역이 초상화에서 강점을 지니는 것은 조선말의 어진화사 채용신과도 관련이 있다. 석지 채용신은 본래 무과에 급제한 무관이지만, 그림 솜씨가 뛰어나 어진화사로 발탁되었다. 1900년 창덕궁 선원전에 봉안할 태조어진을 비롯해 7조 어진을 제작하였고, 이후 고종어진 제작에 참여하였다.
1906년 채용신은 전주로 낙향하여 정읍 신태인에서 작고할 때까지 90평생중 40년을 전북지역에 살면서 초상화를 그렸다. 그리하여 어진화사가 그린 뛰어난 초상화들이 전북지역에 많이 남아 있게 되었다. 조선말 우국지사들의 초상화가 석지의 손에서 태어나 그 기백과 정신을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지역적 특질로 전북의 한 지자체에서 전통 초상화 전문 박물관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리고 기존의 미술관을 초상화 특성 박물관으로 키우자는 주장도 있었다. 다 실현되지 못하고, 어진박물관만이 왕의 초상 전문박물관으로 건립되어 운영되고 있다. 지역에서 어진박물관이 중요성을 가지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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