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일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째 되는 날이었다. 100년 전 그날 고창에선 그 어느 지역보다 격렬한 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다. 고창의 3.1운동 전개과정을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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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 성내면에서 시작된 거사 움직임

100년 전 고창군의 2~3월은 뜨거웠다. 고창군의 만세운동은 정읍에 인접한 성내면에서부터 시작됐다. 성내면 월산리에 살고 있던 청년 이종철과 학생 이대성, 이종주, 유판술 등은 만세운동에 앞장 설 것을 결의하고 선언서 등사와 취지서를 작성했다.
3월10일 밤. 그들은 이종주 집에 비밀리 모여, 다수의 종이 태극기를 만들어 사람들이 잘 보이는 곳에 붙이거나 세워뒀다. 새벽에는 ‘대한독립(大韓獨立)’과 ‘독립(獨立)’이라고 크게 쓴 종이 2개를 만들어 장대에 붙여 성내면 면사무소 구내 공터에 세워 놓았다.
아침이 되고 사람들이 모여들자 선언서와 격려문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13일 학교 앞 운동장으로 모이라는 전단도 뿌렸다. 하지만 결국 이 사실이 흥덕면주재소에 알려지고 이종철 등 4명이 검거돼 성내면 거사계획은 좌절됐다.

■100년전 3월15일 무장면에서의 만세운동
 
며칠 후 무장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에도 읍내의 김영완은 고종 황제 국장을 앞두고, 서울에 올라갔다가 3월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고향으로 내려와서 유지 이용욱, 김용표, 김상수, 이준구, 김진호, 박흥선, 오태근, 박흥수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결정하고 15일 무장읍 장날을 이용해 거사를 치르기로 했다.
드디어 3월15일. 장꾼들이 많이 모이기를 기다리던 이용욱·김용표 등은 미리 등사해 두었던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들에게 나눠줬다. 김영완은 군중들 앞에 나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자 군중들이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따라나섰다.
이용욱·김응표 등은 태극기를 높이 들고 선두에 서서 군중을 지휘하며 대열을 지어 시위행진을 시작했다. 만세의 물결은 남문을 지나 면사무소와 주재소 앞으로 나가며 기세 드높게 행진했다.

■김승옥·오동균 등이 주도한 고창읍 만세운동

고창읍에서도 21일 만세시위가 벌어졌다. 이보다 앞서 읍내의 김승옥·오동균 등은 독립선언서·국민휘보(國民彙報)·조선독립가 등의 문서를 얻어 등사판에 복사한 뒤 고창군내 유지와 학생들에게 연락해 19일 고창읍 장날에 만세운동을 열기로 했다.
그러나 거사 계획이 사전에 노출돼 당일 진행은 취소 됐다. 하루를 건너 21일. 다시 일부의 학생들과 모여 오전 11시께 청년·학생 등 1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고창읍내 큰 거리를 행진했다. 그 중에도 김승옥은 선두에 서서 독립운동 연설을 하고, 오동균은 선언서·조선독립가 등을 배포하며 군중들을 격려해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를 받았다. 

도중에 적 경찰대의 저지도 있었다. 하지만 군중들은 굽히지 않고 더욱 기세를 올리며 군청으로 밀려가 군수와 군 직원들에게 만세운동에 참가하도록 강력히 요구해 형세가 더욱 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적 폭력에 의해 오동균·김승옥·김창규 등 10여 명이 붙잡히고, 군중은 해산됐다.
25일에도 고창군내 여러 곳에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있었으며, 28일에는 다시 흥덕면 흥덕리(興德里)에서 집집에 태극기가 게양된 사실이 있었는데, 적측에게 태극기는 탈취당하고 학생 3명이 붙잡혔다.
당시 학생들은 재판에서 “조선인으로서 조선 독립만세를 부르는 것은 조선인의 본무(本務)이다. 이것이 불의의 일도 불량의 일도 아닌데 어째서 처벌을 받는다는 말이냐?” 고 항쟁하였지만 모두 기각당하고 말았다.
/국가보훈처 발행 ‘독립운동사 제3권:삼일운동사(하)_2장 전북서부지방 제5절 고창군 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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