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한 뼘이라도 영토를 더 넓히려고 싸우는 통에 전쟁터는 시체로 가득했지….”

24일 만난 6‧25 참전유공자 유인수(92)씨는 상기된 표정으로 당시 전쟁터를 회상하며 말을 꺼냈다.

1951년 그는 21세의 나이로 징집돼 제주도에서 3주간 신병훈련을 받던 중 이질병에 걸려 부산의 한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어느 한 여름 컴컴한 밤 이름 모를 전우들과 함께 트럭에 실려 격전지인 강원도 양구지역에 배치됐다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유씨는 전선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된 전쟁속에서 부족한 군인들을 충원하기 위해 올라온 이들은 중대장과 소대장, 분대장이 누군지도 모르고, 심지어 총을 다루는 법도 모르는 이들도 바로 전장에 투입됐다고 설명했다.

1950년 6월 25일 6‧25 한국전쟁 발발 후, 미군과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 한반도의 전선은 시시각각 변하던 중, 10월 현 38선 인근으로 고착화되면서 휴전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 지난한 싸움은 진행됐다.

“격전지는 밤마다 하늘이 붉게 물들었지.”

1951년 휴전회담이 개시되자, 서로 영토를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더욱 치열한 전투가 이뤄졌다.

당시 현장을 유씨는 “남과 북 사이 전선 가운데 위치한 572고지에는 전쟁으로 쌓인 시체가 썩어 역한 냄새가 진동했다”며 “전쟁터를 가득 메운 시체로 현장은 말도 못할 정도의 참혹했다”고 말했다.

이어 “겨우 수습한 전우들의 시체는 겨우 흙 한줌으로 덮어줄 수 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이뿐만 아니라 장기화된 전쟁으로 그들은 지독한 굶주림에 시달렸다.

그는 하루 한 번 겨우 올까하는 배식에서 반합의 반찬통에 겨우 반절이나 될까하는 밥과 새우젓이나 된장국이 전부였다”며 “전쟁과 각종 진지공사로 고단한 몸에 제대로 보급도 되지 않아 건빵 3봉지에 전향하는 병사도 있었다”고 말했다.

유씨는 전쟁 당시 인민군에 포로로 잡혀 끌려가던 중 탈출에 성공해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 그는 “새벽에 격전지로 시커멓게 몰려오는 중공군들이 참호를 덮쳐 육박전을 벌이다가 인민군 포로로 잡혔다”며 “밥 한끼 못 먹고 일주일간 잡혀 있다가 어두컴컴한 새벽에 끌려가던 중 겨우 도망쳤다”고 말했다.

도망친 그는 일주일간 포탄이 날아드는 산속에서 숨어 있다가 남쪽으로 겨우 탈출했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민족의 비극을 겪었던 그는 “이념과 사상으로 인한 비극은 되풀이 되면 안 된다”며 “민족끼리 대화와 만남을 통해 비극을 끝내야 한다”고 말했다./김용기자‧km4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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