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산에서도 더 안쪽으로 굽이굽이 차를 타고 들어가니 왼편으로 도정공장이 보인다.
지평선이 보일만큼 넓은 논 가운데 위치한 번듯한 공장은 마치 이곳을 지키는 장승처럼 우뚝 서서 손님을 맞는다.
그 건물 한바탕에 물이 흐르는 듯한 느낌의 글씨체로 큼지막하게 써있는 '생금들' 이란 글자가 햇볕을 받아 찰보리처럼 노릇한 빛을 뿜어냈다.
짜임새 있는 규모를 유지하면서도 깔끔한 공장은 이곳에서 생산되는 제품에 대한 믿음의 근거 그 자체다.
여름의 초입에서 굵은 땀방울을 흘리며 보리 도정에 한창인 '한성안' 생금들 친환경영농조합법인 대표를 만나봤다. /편집자주

지금은 영농후계자로 고향에 완벽히 뿌리내린 그이지만 처음부터 이 길을 택했던 건 아니었단다.
"다른 평범한 학생들처럼 점수 맞춰 4년제 대학 공대에 입학했어요. 1년정도 공부해본 후 군대를 다녀와 복학해 신소재를 전공했는데 저랑 너무 안맞더군요."
공대에 가면 먹고 살 길은 열리겠지 싶었지만 공부를 하면 할 수록 재미도 없고 미래가 예상되지 않아 점차 학교생활에 흥미를 잃어갔다.
그런 아들을 걱정스럽게 바라보던 어머니는 차라리 농사일을 해보는 것은 어떻겠냐며 농수산대학을 추천했다.
농사일은 어렸을 때 부터 보고 자란 일이니 마냥 못할것 같진 않았다. 무엇보다도 농사일을 선택한 이유는 '자율성'에 있었다.
"다른 직장 생활은 내가 직접 계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지만 농사는 하나부터 열까지 제 스스로 기획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엄청난 매력이더라구요."
내가 한 만큼 보상이 눈으로 보이고 손으로 잡히는 농사일은 성취감을 맛보고 싶었던 한 대표에겐 천직이나 다름 없었다.
대학교를 졸업 후 부모님이 평생 일궈온 논 10만 평을 이어 받아 농사를 시작했다. 부모님 세대처럼 농사만 잘 지어서는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한 대표는 영세소농인들의 연대체를 구성했다.
'생금들 영농조합법인'의 시작인 셈이다.
처음엔 찰보리 정미소로 출발했다. 재미있었다. 수확도 좋았고 그에 따른 수입도 좋았다. 하지만 여기에 안주할 순 없었다. 혁신이 필요했다. 그가 고민 끝에 내린 변화는 바로 '포장단위의 변화'였다.
가공의 종류는 다양했지만 소화해 낼 수 있는 가공엔 한계가 있었고 그 즈음 식생활의 변화도 눈에 띄었다. 더이상 사람들이 집에서 밥을 매 끼니 해먹는 시절이 종말한 것이다.
1인 가구와 맞벌이 가구의 폭발적인 증가로 곡물의 소포장 수요도 함께 증가했다. 젊은 감각의 한 대표가 이것을 놓칠 리 없었다.
생금들에선 30g의 최소단위 포장 잡곡도 만날 수 있다. 커피스틱같은 포장재에 2인분 단위인 30g를 담아 10개씩 박스포장을 했다. 고객은 그저 구매한 후 집에가서 먹을 만큼 뜯어 씻기만 하면 된다.
찰보리 농사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생금들에서는 군산에서 생산된 찰보리 위주로 취급한다. 매년 500톤 가까이 수매하는데 그 중 350톤이 '군산 출신' 찰보리다.
단순히 고향이 군산이라서 선택한 건 아니었다. 군산 찰보리는 다른 지역 보리보다 품질이 우수했다. 해풍을 맞고 커서 알곡도 토실토실하고 묘하게 맛도 좋단다.
찰보리쌀 유통 뿐 아니라 가루 가공도 나섰다. 현재 군산의 명물인 '진포빵'을 만드는 모든 매장에선 생금들의 찰보리가루를 쓴다. 생금들 역시 동네빵집 활성화 정책에 따라 군산시에서 포장지와 간판 지원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상생할 수 있었다.
"가공은 사실 너무 까다롭습니다. 곡물제분법에 의거해 철저히 관리를 해도 한번 민원이 걸리면 한 달 번 돈이 다 허공으로 뿌려지기도 비일비재 했죠."
가공에 대한 열의는 높았지만 그것에 따른 다양한 법규를 미처 숙지하지 못했던 탓이다. 그는 거듭 후배들에게 당부한다. 시작 전에 관련 법규를 숙지하고 차근차근 해 나가도 늦지 않다고 말이다.
혹독한 수업료를 지불한 한 대표는 무엇보다 가공 환경에 많은 신경을 썼다. 건식제분의 경우 기류식 기계를 사용해 환경과 안전 문제 두마리 토끼를 잡았다.
그런 덕분일까. 생금들은 정부의 각종 지원사업을 따 내기도 하고 전라북도 농업기술원에서 시행한 지원사업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며 미래가 기대되는 영농조합으로 성장했다.
컨테이너 하나 놓고 시작한 사업은 이제 학교 후배들을 양성해 한국의 농업 부흥을 위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한 대표. 그런 그가 아쉬운 한 가지를 어렵게 꺼내놓았다.
"정부 정책상 귀농인에 대한 우대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랫동안 농사일만을 천직으로 삼고 그것을 보고 자란 영농후계자에 대한 지원도 비슷한 형평성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현재 정책이 귀농·귀촌인들에게 쏠려 있는 것을 염려하면서도 자신의 뒤를 이을 후배 영농후계자들에 대한 배려도 놓치지 않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이제는 쌀과 보리를 넘어 기타 작곡(수수,기장,차조 등)에 관심을 돌린 한 대표. 잡곡이라는 것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유행을 타기 때문에 시기에 맞는 잡곡을 선별해 포장까지 원스톱으로 해내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귀리 열풍이 불었어요. 올해부턴 수수나 기장 쪽으로 소비자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그런 상황을 위해 미리 준비해두려 합니다."
깔끔하고 널찍한 영농조합이지만 아직 제품을 체계적으로 관리할 제품실이 없었다는 한 대표는 올해는 제품실을 조성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제품을 잘 생산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생산한 제품을 안전하게 보관하고 그것을 소비자의 부엌까지 그대로 전해야 제 임무가 끝나는 거라고 생각해요."
인터뷰가 진행되는 중에도 묵묵히 구슬땀을 흘리며 작업에 열중하는 후배들을 보며 마지막으로 후배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그는 운을 뗏다.
"젊은 후계영농인들은 운 좋게 부모님의 터전에서 시작하게 되는데 그것만 믿고 무작정 이 길로 뛰어들어선 안된다고 말하고 싶어요. 부모님의 일궈놓은 농사 면적을 더 늘려가야만 버틸 수 있기 때문이죠. 무엇보다도 뭐든 다 잘하겠다는 생각 대신 한가지라도 완벽히 해낸다는 마음이 필요해요. 제가 그러지 못했기 때문에 후배들은 그런 시행착오를 겪지 않았으면 합니다."
자신의 실패를 감추기 보단 실패를 공유하며 모두의 발전을 고민하는 한 대표의 미래가 그의 상호명 '생금들', 즉 생생한 금빛 들녘처럼 빛날 것이라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해 보인다. /홍민희기자·minihong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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