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군의 독립만세 운동은 무주군 적상면에 있는 여올교회(당시 늘갓교회)의 장로였던 전일봉에 의해 시작되었다. 전일봉은 1896년 10월 20일 생으로 적상면 삼가리 늘갓마을에서 농사를 짓던 전치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전일봉은 어려서부터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강인한 성품을 지녔으며, 어려운 사람을 보면 도와 주는 것을 좋아했다. 또한 머리가 총명하여 일찍이 집안 어른들로부터 한학 공부를 하여 삼강오륜과 인륜도덕을 터득하고 미풍양속을 깊이 새기었다.

산간 오지였던 당시 늘갓마을에 일찍이 복음이 전파되어 전일봉은 신앙과 더불어 민족의식을 깨우칠 수가 있었다. 그러던 중에 1916년에 마을에 삼숭학교가 설립되어 초대 교장으로 전우삼이 추대 되었고 조카인 전일봉은 교직원 자격으로 학교 운영을 맡게 되었다. 삼숭학교가 설립되면서 젊은이들에게 민족의식과 애국의식을 심어주게 되었고 한때 무주를 비롯해 진안, 장수, 금산에서도 많은 학생들이 모이기도 했다. 전일봉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기초로 하여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뜨거운 마음이 신학문을 접하면서 더욱 타오르게 되었다.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국장을 계기로 서울의 탑골공원에 전국 방방 곡곡에서 수많은 민중들이 모여 독립을 선언한 후 온 천지를 진동시킨 대한독립만세 운동은 온 백성들의 마음을 한마음으로 만들어 단결력을 과시 함으로써 일본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 소식은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고, 산간오지로써 교통과 통신이 발달하지 못했던 무주지역에는 서울의 만세 운동 소식과 독립선언문이 전달된 것은 1주일이 늦은 3월 7일 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전일봉은 한윤성, 전찬중, 송희중, 김재순, 신재희, 박찬수등과 그림 솜씨가 좋았던 한판익이 함께 모여 독립만세운동의 거사 계획을 의논하게 된다.

이들은 밤마다 골목안 오막살이에 모여 이불로 창문을 가리고 밤이 새는줄도 모르고 태극기를 직접 그렸다. 그리고 직접 그린 태극기를 단지에 넣어 감나무 밑에 묻어놓고 때를 기다렸다.
1919년 4월 1일 무주 장날, 새벽부터 동지들은 약속 장소에 모여 나뭇짐을 실은 장짐에 태극기를 숨기고 장꾼들 틈에 숨어 순사들의 눈을 피해 읍내장터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장이 한창 서는 오후 2시경.. 전일봉은 장터 한 가운데 서서 우리나라 실정과 3.1운동이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일본을 몰아내고 나라를 되찾자고 목놓아 외쳤고, 그때 군중속에서 ‘옳소’하는 함성과 함께 박수가 터져 나왔고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송희중과 김재순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뛰어나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했고 그 자리에 있던 민중들과 함께 만세운동이 시작되었다.

만세운동을 방해하기 위해 일본 순사들은 민중을 향해 총을 발포 했고, 총소리에 놀란 민중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때 주동자였던 전일봉과 신재희 박찬수 등이 현장에서 체포되어 일본헌병대로 연행되어 갔다.

붙잡히지 않고 흩어졌던 동지들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밤에 산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이산 저산으로 봉화를 피어올리며 운동을 계속했다. 헌병대에 연행되어 갔던 전일봉은 금산지청으로 연행되어 간후 징역 8개월의 형을 선고받고 서울 형무소에서 복역하며 옥고를 치뤘다.
이일로 교회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늘갓교회(여올교회)와 무주읍교회가 당분간 문을 닫기도 했다. 전일봉은 옥고를 치룬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와 일본의 눈을 피해 사람들에게 애국정신을 심어주는 교육을 멈추지 않았다.
무주 4.1만세운동 이후 무주 지역에서는 신흥 종교인 증산교(흠치교)와 공도회 등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시위가 전개되었으며 이후 5월까지 7회에 걸쳐 3,500여 명이 참여했다.
지금도 무주군에서는 매년 4월 1일이 되면 당시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던 무주장터에 모여 온 군민이 모여 기념식을 하며 그날의 정신을 되새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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