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운동 100주년 맞은 순창 독립운동사

 

1919년 3월 1일, 탑골 공원에 모여 민족대표를 기다리던 학생들과 시민들은 스스로 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거리로 만세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날 촉발된 3.1운동은 3월 20일 순창에도 울려퍼졌다.

애국 청년 박동진(朴東鎭)은 3월 15일 밤, ‘조선독립국만세(朝鮮獨立國萬歲)`‘조선독립국 독립만세(朝鮮獨立國 獨立萬歲)` 문구를 종이에 크게 써 내려갔다. 3월 17일 새벽, 박동진은 군청과 헌병분견소, 순창학교조합 등에 종이를 붙이며 항일운동에 불을 붙였다. 20일 밤이 되자, 천도교인들이 하나 둘씩 모이자, 어느새 군민 200여명이 비밀리에 순창읍 뒷산에 모여들었다. 그리고 준비했던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횃불을 들어 기세를 올리며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한밤중에 군민들의 가슴에 한국독립의 기치를 세우는 우렁찬 함성소리가 순창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 항일독립운동 우치홍(禹致洪) 의사와 김일두 독립투사

 

우치홍은 동학혁명 당시 간부로 활동했던 우동원의 둘째 아들이다. 3.1운동 전라북도 선전책임자로 1919년 3월 7일 천도교 총부(總部)에서 이동훈에게 독립선언서 2백장과 ≪독립신문≫ 1백 50장을 받아 3월 8일 극비리에 천도교 전주교구에 전달했다. 천도교 전주교구에 전달한 후 밤을 새워가며 금산(金山)·무주(茂朱)·진안(鎭安)·임실(任實) 등 군의 각지를 역방하면서 천도교구에 본 선언문을 전달했다.

순창으로 들어오던 중 인계면(仁溪面) 쌍암리(雙岩里) 거릿집에서 미행하여 온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었다. 이후 김구(金九) 선생을 따라 북경을 거쳐 상해임시정부 일원으로 종사하였으며, 1927년에 귀국하여 6. 10 만세 운동에 가담하는 등 계속 항일운동을 하였다.

김일두는 1907년 원주 진위대 특무장교 출신인 민긍호 의진에 들어가 일본군과 싸웠다. 1910년 가산을 정리하여 폭탄 400여개를 구입하여 전국 경찰서를 파괴할 계획을 세워 추진하다가 실패하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적극 추진했다.

1919년에는 상해 임시정부 통시원으로 국내로 밀파되어 군자금을 모집하다 체포되어 복역하였다.

 

▲ 3‧1 운동 100주년을 맞아 송광춘 의사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순창군 쌍치면 출신 송광춘(宋光春 1897~ )의사가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3.1운동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이는 정재상 경남독립운동연구소장이 국가기록원에서 광주 3.1만세운동 참여자를 발굴해 서훈 신청을 해 얻은 뜻 깊은 결과다.

 

 

▲ 3.1절이 지나도 이어지는 기념행사

 

순창군이 지난 3월 1일 오전 10시 향토회관에서 각계각층에서 모인 500여명과 함께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정신을 계승하고 그 명예를 선양하고자 3.1절 100주년 기념행사를 대대적으로 가졌다. 이어 11시에는 쌍치면 영광정에서 ‘8인 의사 추모제’가 열렸다.

영광정은 독립운동가 김원중 선생을 비롯해 이 지역 출신 이항노, 김정중, 설문호, 이봉운, 안종수, 송극빈, 김요명 선생 등 8인의 애국동지들이 1910년 한일병탄이 이뤄지자 미친 사람 행세를 하면서 독립군 자금 모금과 항일투쟁 활동을 전개했던 장소다.

순창군은 이곳에서 매년 애국지사를 기리고 나라사랑하는 마음을 되새기고자 8인 의사 추모제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또한 그 달 20일에 향토회관에서 만세운동 문화제가 열렸다. 이번 문화제는 만세운동의 첫 시발점인 금산에서 시작해 평화의 소녀상까지 행진하며 자주독립을 위해 희생한 선열의 정신과 활동을 기리고자 마련됐다.

금산 순평사 입구에서 소녀의 상까지 약 2km의 행진인 1부 행사가 끝나고, 2부 행사에서는 순창 향토회관에서, 관내 청소년들과 지역 예술인들이 자체 기획한 뮤지컬 `아리랑` 공연을 선보였다.

약 1시간 가량 이어진 공연은 전문 예술인 지도로 아마추어 고등학생 참여해 지역사회의 그 의미를 더했다. 순창=이홍식 기자. hslee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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