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명은 역사와 문화가 담겨있으며 지형의 특징에 따라 만들어지기도 한다. 임피(臨陂)는 다다를 임자에 방죽피자를 쓴다. 방죽이 많아서인지 옛부터 가뭄 피해를 입지 않는 지역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용이 출현한 몇 안 된 곳으로 기록되어있다. 마한시기에는 시산국이었다가 통일신라 경덕왕 때 임피가 된다. 7개리로 이루어졌는데 남산을 기준으로 서북쪽으로는 읍내리, 축산리, 미원리 남동쪽으로는 영창리, 보석리, 술산리, 월하리가 있다.
  마을의 이름을 풀어보면 재미있다. 관아가 있던 읍내리, 독수리 모양을 띈 산이어서 취성산이라고 불렀다가 축성산으로 어의 변화가 이루어지다가 축산리가 되었다. 미원리는 미산(米山)과 서원(書院)이 합해서 된 이름이다. 쌀이 많이 나오는 곳과  그리고 봉암(鳳巖)서원이 있었던 곳이었다. 보석(寶石)리는 보암(寶岩)과 석곡(石谷)이 합해서 된 이름이다. 보물이 있는 바위라고 해서 보암인데 실재 보물을 캐어낸 자리가 굴이 되어 굴바위라고 한다. 어릴적에 그곳으로 소풍을 갔었다. 영창(永昌)리는 영원히 창성하라는 뜻이고 월하(月下)리는 달 아래 마을이다. 필자가 어린시절을 보낸 곳이다. 어릴적 밝은 달이 휘영청 떠오르면 달 아래서 밤 늦도록 친구들과 뛰어놀았다.
  탑천은 지금은 대야면에 속하지만 조선시대 임피현 남이면에 속한 탑동리에 있는 탑을 마주보고 흘러서 붙여진 이름이다. 탑동에 있는 탑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3층 석탑이지만 백제양식을 띄고 있다. 이는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백제인임을 잊지 않았다는 증거다.
         

학당산은 서당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필자가 태어난 임피면 월하리 서황마을에 있는 작은산이다. 그 옛날 학당산 아래에는 문서당이 있었다. 그 서당에는 지혜로운 문훈장님이 계셨다. 아랫녘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갈 때 학당산을 거쳐 공주고개를 지나 금강에서 배를 타거나 걸어서 한양으로 갔다. 한양으로 과거보러 가는 길목에 문서당이 있어 쉬기도 하고 훈장과 나눈 대화가 시험을 푸는데 도움이 된다는 소문이 나면서 과거 보러가는 사람들은 문서당을 들르곤 했는데 스승을 만나기 전 의관을 다듬고 신발에 묻은 흙을 털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동네를 신털메라고 부르게 되었다.
  학당산을 넘는 공주고개에 대한 전설도 있다. 고조선의 준왕이 위만에게 쫓겨서 부하를 데리고 남하하던 중 금강하구로 들어와 마한을 세웠다는 설이 있다. 금강을 따라가다 익산에 목지국을 세웠는데 가는 길에 공주가 아파 산에서 쉬라 하고 나중에 데려갔는데 공주가 머물던 산을 공주산이라고 했고 그 산으로 이어지는 고개를 공주고개라고 했다.
  꽃살메가 있는 임피면 술산은 개가 엎드려 있는 모습의 산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술산은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되어있는 조선7대 명당에 속한다. 내 어릴적에도 나침판을 들고 동그란 안경을 낀 지관들이 우리 동네에 많이 왔던 기억이 있다. 수많은 지관들이 명당자리를 찾아서 전국을 돌아다지만 신기하게도 명당자리는 먼곳에서 보면 잘 보이다가 가까운 곳에서 보면 잘 보이지 않는 특성이 있다고 한다.
  사람의 향기는 시공간을 넘어서 멀리 전해진다. 작은 동산 꽃살메에는 무덤 두 개가 있다. 무덤의 주인공들이 남긴 이야기는 남다른 향기를 전한다. 큰 무덤에는 우암 송시열의 9대 손인 연재 송병선 선생님이 묻혀있다. 또 다른 작은 무덤에는 선생의 노비였던 공임의 무덤이다.
 
                           

송병선 선생은 조선후기 유학자로서 나라가 기우러짐은 인재의 부족이라 여기고 후진양성에 매진하셨다. 전국을 다니면서 강연을 하셨는데 특히 임피에 자주 오시고 많은 사람을 만나셨다. 고봉산 위에는 낙양정을 짓고 강연을 하셨다. 낙양정을 처음 연날 최익현 선생도 참여했다고 하니 그의 인지도를 짐작 할만하다. 을사늑약 후 선생은 자결을 한다. 
  <혼불>의 작가 최명희는 4권의 첫머리에서 이곳을 묘사했다. 하얀 옷으로 갈아입고 임금님이 계신 곳을 향하여 절을 한 후 극약을 마시고 피를 토하고 자결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노비공임은 선생을 껴안고 애닯게 운다. 선생의 옷에 있는 피가 공임의 옷에 스며들었고 공임도 사발에 남은 극약을 마져 마시고 따라 생을 마감한다. 물론 허구이다. 실재는 노비공임은 선생이 돌아가신 소식을 듣고 자결을 했으나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고 한다. 
  선생은 임피를 자주 오가는 중 부인이 먼저 생을 마감하자 명당자리인 꽃살메에 묻었다. 그는 돌아가신 후 다른 곳에 묻히셨으나 제자들이 이곳에 합장을 하였다고 한다.  꽃살메의 붉은 황토가 햇살아래서 황금빛깔을 띄며 뽀송뽀송하다.
  임피읍내는 채만식 선생의 탄생지이기도 하다.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삶에 대한 묘사를 제대로 한 소설 <탁류>의 작가다. 자수성가한 부농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아버지와 형이 미두에 손대 집안이 망하고 난 뒤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마무리하지 못하고 귀국해야 했다. 채만식 작가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부당한 행위와 힘든 조선인들 삶을 해학과 풍자로 적어낸 소설의 현장이 군산 구도심에 가면 지금도 그대로 남아 있다.
  임피에는 이인식 선생님도 계신다. 선생님의 집안은 만석꾼이었다. 보성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루셨다. 감옥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을 만났고 군자금이 필요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출옥 후 집안의 전답을 거의 다 팔아 군자금을 직접 상해까지 전달해 주었다. 고향으로 내려와 인재양성에 혼신을 다했다. 임피 중학교 2대 교장에 취임을 하면서 가난해서 학교를 가지 못하고 부모의 일을 돕는 청소년들에게 찾아가 부모를 설득하고 임피 중학교를 다니게 했다. 학비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벌게 해서 졸업을 시켰다. 선생님의 제자들 중에는 군 장성, 작가, 교육자들이 나왔다. 제자들은 선생님이 돌아가신지 50년이 지나는 동안 모임을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추모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임피면 읍내에는 임피향교가 있다. 읍내에는 관아도 있고 현감도 있었다. 그들이 떠난 자리에는 송덕비를 세운다. 향교 근처에 있는데 다른 곳에 있는 것과는 다르다.  이방들의 송덕비도이다. 이것으로 보아 임피현은 사또의 절대권력 보다는 실무를 담당하는 이방들의 의견이 강하고 민의가 좀 더 존중되는 곳이 아니었나 추측해 본다.
 
                

향교 앞 연지는 아름답다. 왕버드나무가 가지를 휘늘어지게 뻗고 옥란교로 연결되어져 마치 섬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옥란교에 얽힌 설화가 있다 사또 친구가 섬으로 유배를 가게 됐다. 수심에 쌓여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딸 옥란이 의견을 낸다. 호수를 파고 그 가운에 섬을 만들어서 집을 짓고 친구를 살게 하고 매일 아침저녁으로 먹을 것을 갖다 주었다 한다. 그래서 연지 안에 있는 다리를 지금도 옥란교라고 부른다.
  임피 읍내의 양반들은 읍내로 철도가 지나가는 것을 결사반대했다. 결국 술산으로 철도가 지나가게 되었고 역의 이름은 임피역이다. 1912년 호남선의 가지선으로 만들어진 군산선은 익산에서 군산내항까지 이어졌다. 만경평야에서 소출된 쌀은 간이역인 임피역을 통해서 실어갔다. 해방 후부터 군산과 익산을 오가던 꼬마기차가 2008년에 멈추기 전까지는 통학생과 통근자들을 실어 날랐다. 통학을 하던 학생들의 하얗고 까만 교복의 모습은 추억의 사진처럼 기억에 남아있다. 
  자연은 마을을 품고 있다. 마을은 사람을 품어서 성장케 했다. 사람은 그 자연을 닮아간다. 구릉진 산과 넓은 들판과 넉넉한 물의 향기처럼 임피면 사람들의 향기도 그렇다.
                                               /아리울역사문화 대표 문정현

                                              /사진=채승훈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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