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상진 데이터정책칼럼리스트, 전북대 겸임교수(행정학박사)

“기도하는데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요”. 난생 처음 교회라는 곳에 다녀온 초등학교 4학년 막내아들의 소감이다. 그동안 잘못한 사건들을 연상하면서 죄책감으로부터 회개를 경험한 것이다. ‘기도’라는 용어가 아직은 어색한 필자에게는 작은 충격이었다.

우리집은 종교가 다양하다. 어머니는 50여년 절에 다니셨고, 아내는 모태 가톨릭 신자다. ‘카타리나’라는 영세명까지 받았다. 나는 특별한 종교적 생활을 하지 않다가 두달 전 교회 성도가 되어 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영생을 갈구하는 신앙생활이라기보다는 각박한 현실 속에서 마음의 안식처를 찾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문명사회에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달하는 가운데 여전히 우리 삶의 숙제로 남아 있는 종교의 역할이 무엇일까. 때때로 고민아닌 고민을 한 적이 있다. 40대 후반, 응팔세대로 불리는 우리는 많은 학령인구로 구성되어 대학입시때에는 박터지는 경쟁을 펼쳤고, 대학 졸업할 무렵에는 IMF 환란을 맞아 비정규직이라는 새로운 사회계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먹고살기 바쁜 나날을 거치다 보니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조차 감정의 사치처럼 여겨졌다.

더군다나 불가능을 모르는 인간의 영역이 하루가 다르게 넓어지다 보니 종교는 더 이상 신비로운 대상이 아니었다. ‘과연 신이 있다면’이라는 가정을 떠올릴 만큼 엽기적인 사건사고들도 숱하게 접했다. 급기야 우리를 지배하는 정신세계와 육체적 선택과정은 인간이 진화해 오면서 축적된 정보들의 조건반응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종교를 바라보는 이중적 시각이 공존한다. 종교에 대한 신심이 옅어지는 만큼 삶은 피폐하고 정신이 공허해 지는 반면, 그래서 다시 종교를 찾게 되고 의지하게 된다. 흔히 과학과 종교를 대립적 관계로 인식한다. AI(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제는 종교에 대한 새로운 개념정의가 필요할 것 같다. 종교는 법과 제도로서 규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해 윤리적 규범으로 우리 스스로를 제약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처음 찾은 교회에서 목사님 설교와 기도를 통해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는 막내아들을 보면서 애써 외면하려했던 종교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 생각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신은 죽었다’는 니체의 공언에 일면 동의하면서도 물질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공동체를 보존하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한 규범은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비록 종교에 대한 일부 부정적 시각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우리 사회에서의 긍정적 요소로서 종교를 부정해서는 곤란하다. 부정은 없애고 긍정을 키우려는 스스로의 노력도 필요하다. 세 아들 가운데 청년이 되어가는 두 아들에게는 관광지 사찰을 찾은 것 이외 딱히 종교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했다. 우연히 ‘친구따라’ 교회에 간 막내아들만이 ‘창조론’과 ‘진화론’을 스스로 고민하면서 종교에 관심을 갖는게 대견할 따름이다.

수천년 인간을 지배해 온 종교가 허무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역설적으로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면서 다시금 우리 삶을 지배할 날이 머지않은 것 같다.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롭고 영생을 구하는 전통적 의미에서의 종교를 넘어서 자발적 행동규범으로서 그리고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기 위한 기준으로서의 생활종교가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하지 않을까. 아이들에게 학교에서 접하는 딱딱한 교육으로서의 종교가 아닌 현장에서 마음으로 접할 수 있는 종교가 될 수 있도록 보다 많은 기회를 마련해 주자. 제분야에서 로봇이 인간을 대체하더라도 로봇을 만드는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을 결코 잊지 않기 위해서라도 종교의 역할에 힘을 실어주자.

“과학이 잘 작동하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서는 종교의 도움이 항상 필요하다. 과학자들은 세계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연구하지만, 인간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과학적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만이 필요한 지침을 제공할수 있다” - 유발 하라리

불과 두달 전까지 종교적 허무주의자였던 필자에게 새로운 영감과 깨달음을 선사해 준 막내아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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