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창읍성

<여행·체험1번지 전라북도- ⑦전북 사적 4읍성>역사공부와 자연경관을 감상할 수 있는 곳
⑵고창읍성·무장읍성
▲고창읍성
고창읍성은 사적 제145호로 1965년 4월 1일 지정되었다. 이번에 소개한 사적 네 곳의 읍성 중 가장 규모가 굉장히 큰데 둘레가 무려 1684m이며 면적도 19만여 평방미터에 달한다.
성의 규모에서 보듯 성을 쌓기 위해 고창군민의 힘만으로는 어려워 호남 여러 지역에서 백성들이 와 성을 축조했다. 성의 축조 시기는 조선시대 단종 시기로 읍성 중 낙안읍성, 해미읍성과 더불어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는 읍성이다.
성 둘레로 각자 참여한 고을마다 표석이 있었다는데 요즘 도로를 만들 때 공사한 회사 이름을 각 구역마다 세운 것과 비슷하다. 고창읍성 축조에는 전라우도인 고창, 무장, 흥덕, 옥구(군산), 용안(익산), 김제, 정읍, 고부, 태인, 영광, 장성, 진원(장성), 함평, 심지어는 제주에서도 왔으며 전라좌도인 용담(진안), 임실, 순창, 담양, 능성(화순) 등 무려 19개 군현이 참여해 3년여 공사 끝에 완성했다. 표석은 세월이 오래되고 훼손돼 잘 안 보여 각종 문헌과 현장조사를 참고해 1997년 고을 표석을 만들어 입구에 세웠다.
그럼 가장 잘 보존된 고창읍성에는 어떠한 역사가 숨어있는지 살펴보자. 고창읍성의 성벽은 꽤 높다. 벽도 수직이어서 함부로 접근할 수 없을 정도이다. 성 안에는 관청이 있고 백성들은 성 밖에 살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모두 성안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 등 22개의 조선시대 관아가 있었으나 전쟁을 거치며 모두 소실되었던 것으로 복원해 현재 14동의 관아 건물이 있다.
고창읍성은 조선시대 초기에 축조했지만 임진왜란이나 정유재란 당시 전투기록은 없다. 당시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세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동학농민혁명 당시인 1894년이 첫 전투기록이니 본질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났다. 여러 고을에서 수만 명의 백성이 동원돼 읍성을 축조했는데 첫 전투기록이 동학농민혁명이라는 것에 잠시 숙연해진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고창읍성에는 관군과 일본군이 주둔했으며 동학농민군은 기습에 성공해 이들 일본군을 섬멸했고, 두 번째는 일제강점기 호남창의맹소라는 의병군을 조직한 장성의 기삼연의 부대가 고창읍성에 주둔 중인 일본군을 섬멸하고 무기까지 노획했다는 기록이 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지은 성이지만 훗날 이곳에서 왜구를 섬멸했으니 애초 축조 이유는 달성한 셈이다.
고창읍성의 명물인 맹종죽으로 들어가본다. 1934년 청월 유영하 선사가 불전의 대중포교를 위해 이곳에 보안사라는 절을 세우고 운치를 돋우고자 대나무 숲을 조성했다고 한다. 대낮임에도 캄캄할 정도로 대숲이 우거져 운치를 더한다.
고창읍성은 원형이 잘 유지된 읍성으로 해마다 음력 9월 9일 모양성제가 열린다. 머리에 돌을 이고 성곽을 한 바퀴 돌면 다릿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하고, 세 바퀴 돌면 극락에 간다는 답성놀이가 중심인데 성을 다 밟은 후에는 머리에 이고 있던 돌을 성 입구에 쌓았다고 한다. 이는 축성한 성을 밟아 견고하게 유지하려고 이유 때문으로 꼭 답성놀이가 아니어도 고창읍성에 오면 자연적으로 오르게 되는 성곽길이다.

▲무장읍성
고창군 무장면에 있는 무장읍성은 지난 1991년 2월 26일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는데 온전한 읍성 형태가 아니라 여러 곳을 복원한 흔적이 보인다. 앞부분은 돌로 쌓은 성이지만 뒤쪽은 대부분 토성이다. 정읍 황토현 전투에서 대승한 동학농민군이 고창을 거쳐 3일 동안 머물며 휴식을 취한 곳으로 전열을 재정비 중인 동학농민군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조선시대인 1417년(태종 17) 왜구의 침입에 대비 성을 쌓고 관아를 뒀는데 원래 무송과 장사라는 두 고을의 첫 자를 떼어 무장읍성이라 했다. 고창읍성과 마찬가지로 전라도 여러 고을에서 장정과 승려 2만여 명이 동원돼 4개월 만에 축성했다. 성의 둘레는 약 1.2km이다. 성의 축성 시기와 유래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성으로 학술적이나 역사적으로 중요도가 높다는데 성안에는 당시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고창읍성에서 매년 축제가 열리듯 무장읍성도 올해 처음으로 ‘무장읍성 축성 602주년, 1417년 조선시대 과거로’란 주제로 제1회 무장읍성 축제를 5월 14일 개최했다. 현감 부임행차 재현, 비격진천뢰 발굴 및 복원현장 공개프로그램, 조선시대 병영문화체험 등으로 펼쳐져 관광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특히 지난해 출토된 비격진천뢰는 조선시대에 만든 최첨단 시한폭탄으로 선조실록에 보면 “1592년 9월 1일 박진이 비격진천뢰를 성안으로 발사했다. 왜적은 떨어진 비격진천뢰를 앞 다퉈 구경하다 포탄이 터졌다. 소리가 진동했고, 별처럼 퍼진 쇳조각에 맞은 20여명이 즉사했다. 놀란 왜군이 이튿날 경주성을 버리고 도망갔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동안 다른 곳에서 발굴된 5점의 비격진천뢰가 보물 제860호로 지정돼 국립고궁박물관에 보존됐다.
무장읍성에서는 무려 11발이나 무더기로 출토되었으니 조선시대 무장읍성의 위상을 알 수 있다. 취백당을 비롯한 동헌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 무장수비보병대 사무실, 광복 후에는 무장초등학교 교실로 사용됐다고 한다. 많이 훼손되었던 것을 고증을 거쳐 복원했는데 원래 동현 경내에는 수령의 가족이 거처하던 내아, 책방, 정자인 육양정 등 4동의 건물이 있었다고 한다.  현재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5호로 지정됐으며 대청 안에는 최집의 취백당기 등 많은 시가 걸려있다.
토성 위에 올라 무장읍성을 바라본다. 성이 별로 높지 않고 또 뒤쪽은 토성이어서 수비에 치중하기 위한 성으로 보이지는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무장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송덕비를 한데 모아 놓았다. 쇠로 만든 철비는 거의 못 보던 비석인데 조선 후기에는 이런 철비를 더러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강점기 들어 군수용으로 모두 뽑아가 남아있는 것을 별로 없다는 희귀한 문화유산이다.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무장객사는 선조 14년에 세워진 건물로 송사지관이란 편액이 붙어있다. 무송과 장사라는 두 고을의 앞 글자를 따서 무장읍성, 뒤 글자를 따서 송사지관이라고 객사 이름을 붙였다.
전북에는 많은 산성과 읍성이 있지만 사적으로 지정된 성은 익산토성, 남원읍성, 고창읍성, 무장읍성 등 딱 네 곳이다. 사적이라 함은 역사적, 학술적, 관상적, 예술적 가치가 큰 것으로서 국가가 법으로 지정한 문화재이다. 역사의식과 민족정신을 배울 수 있는 교육의 터전 역할이 더 큰 것 같다. 앞으로 이 네 곳의 사적을 방문할 기회가 된다면 관상적 가치보다 역사적인 가치도 살펴보길 권장한다./김대연기자·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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