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숙 전주문화재단 대표이사 
 
 
삶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 질문은 ‘왜 사는가.’를 묻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해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관점을 제외하고 합리적인 답변을 하라고 한다면 거의 답변이 불가능할 것이다. 굳이 궁색하게라도 답을 모색해보자. 첫째, 삶이 우리 자신이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절대적인 의미 부여는 어려우니 결국 살아지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둘째, 그렇다면 굳이 살아가는 것 외에 반대편에 있는 죽음을 선택해볼 때 그 의미가 드러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죽음의 선택과 관련하여 바로 연속해 따라 드는 생각은 내 존재의 시선이 닿는 이 우주 안에서 과연 죽음을 생각하고 선택하는 존재가 인간 외에 있을 것인가이다.
 삶, 생명을 단절시키려는 생각과 의지를 발현하는 존재로는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삶의 시작은 우리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 확실하다보니 마치 부모의 행위에 근원하는 것으로 착각되기도 한다. 하지만 부모조차도 우리의 삶을 선택한 것은 아니다. 단지 성적 행위만이 명백하게 존재했을 뿐, 우리의 생명 현상과 모습은 그들도 선택하거나 디자인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신비한 신체 구조에 내장되고 내재된 수많은 근육과 신경과 세포의 조합을 고려하면 인간은 감히 인간이 상상하거나 선택하거나 디자인할 수 있는 생명체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삶의 시작이 우리의 디자인이나 선택이 아니었다고 할 때, 그리고 부모의 디자인이나 선택이 아니었다고 할 때, 우리에게 남은 선택지는 죽음조차도 겸허하게 우리의 디자인이 아니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합리적인 판단이지 않을까.
 이제야 비로소 왜 사는가. 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서 벗어날 수 있다. 삶의 시작이 우리가 디자인한 것이 아니므로, 우리가 질문하고 답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는 질문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남은 질문은 삶과 죽음 사이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이다. 여기서부터 시간과 공간속에서 살아온 인간들의 경험과 관계와 역사가 중요해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모든 관계에서 진리와 진실에 대한 탐색과 갈등도 시작된다.
 현대 사회에서는 관계의 영역에도 금융 분야의 용어를 활용한 ‘마음계좌’, ‘감정통장’ 등의 용어가 등장하고 있다. 가장 원초적인 인간관계에서 나타나는 갈등은 경제적 지원과 보상만으로는 해소되지 않고, 마음과 감정에 축적시켜 놓은 안심감과 신뢰에 달려있다는 처방전이다. 현대의 삶에 필수적인 경제 단위로서의 화폐의 절대적인 가치를 희석시키는 표현이기도 하고, 어쩌면 화폐의 가치에 매몰되어 화폐의 수렁에 거의 온 몸이 잠긴 우리의 관계에 경종을 울리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전히 삶의 주요 활동인 생산과 소비는 경제적 관점에서 논의되는 것이 비교적 합리적이고, 그러다보니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정신적 생산 활동으로 공감되고 있는 예술조차도 경제적 순환 시스템 안에서 그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예술은 현대의 첨단 기술과 함께 창의력에 기초하여 인류 사회에서 공연과 전시품 등의 생산과 소비를 통한 경제적 발전 뿐 아니라 예술을 매개로 한 공동체 활동을 통해 사회를 유지하고 관계를 치유하는 힘도 발휘한다. 즉 예술 자체의 심미적, 고백적, 고발적, 쾌락적, 선도적 가치 외에도 예술의 후광으로 지역사회의 가치를 상승시키며, 자기만의 예술적 표현이나 감상을 통해 관계 속에서 오는 다양한 갈등을 통찰하고, 해석하고, 해소하여 다시 새롭게 살아나갈 힘을 얻는다. 영화 ‘미션’에 나오는 ‘가브리엘의 오보에’연주를 들으면서 과연 우리의 존재 자체나 관계에 대해 어떤 의문이나 열패감이나 분노를 지닐 수 있을까. 영화음악의 거장 엔니오 모리꼬네(Ennio Morricone)에게 새삼 찬사를 보낸다. 예술의 힘을 실감하는 시간이다. 예술인을 존경하고, 예술 활동을 지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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