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세장리 전경

  지명은 역사와 문화가 담긴 실뭉치이다.
  지명의 유래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와 문화를 솔솔 풀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군산시 회현면 실타래를 풀어가려 한다. 회현은 원래 회미현이었다. 회미의 미자는 꼬리라는 뜻이다. 물이 이곳까지 들어왔다. 옛날에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 중에서 마지막 끝물이라 해서 회미였다. 회미는 신라 경덕왕 때 전국의 지명을 두 글자로 된 한자식으로 통일 할 때 만들어진 이름이다. 마한시기에는 부부리국으로 54개 소국 중의 하나였다. 그 주변에는 시산국(임피), 마서량국(옥구)이 인접해 있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회미현이 되고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꼬리미자를 생략하고 회현이라 불렀다.
  회현면 안에는 8개리가 있다. 고사리, 세장리, 학당리, 대정리, 금광리, 증석리, 원우리, 월연리 이다. 각 마을마다 그 유래가 재미있고 의미가 있다,

  고사리하면 떠오르는 것은 봄이면 산에 지천으로 나오는 나물이 생각날 것이다. 그러나 고사리는 옛날에 절이 있던 동네라는 뜻이다. 백제말 당나라 소정방이 13만 대군을 이끌고 백제를 침공 할 때 금강 줄기에 백제의 수도인 사비가 있기 때문에 당나라군은 군산 북쪽으로 흐르는 금강 하구를 통과해야만 했다. 백제군은 금강하구에서 목숨 건 방어를 했다. 우리 군산에는 오성인의 전설이 내려올 만큼 지역민들도 함께 철통 방어를 했다. 당나라군 일부는 꾀를 내어서 군산의 남쪽에 있는 만경강으로 들어가 육지를 관통해서 사비를 공략하려는 전략을 세운다. 땅끝 마을 회미 사람들도 당나라군과 맞서 싸웠고 많은 희생이 따랐다. 희생자들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절이 세워졌고 세월이 흘러 절을 사라졌지만 옛날에 사찰이 있던 마을이라서 고사리(古寺里)라고 불렀다. 고사리에는 척동마을이 있다. 마을의 기준이 되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풍수지리상으로 회현은 아주 뛰어난 곳으로 그 중에서도 척동마을은 명당 중 명당이라 한다. 명당이란 실은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더 살기 좋은 곳이다. 그러나 후손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해 묘지를 쓴다. 척동마을에는 재실이 7개가 있고 묘지와 비석이 인가의 숫자를 넘어 즐비하다.  

  필자가 살고 있는 군산은 산들이 무리지어 있다는 뜻이다. 그 산들 중에 하나인 청암산이 회현에 있다. 군산시민 뿐만 아니라 외지인들도 즐겨 찾는 곳이다. 원래는 취암산 즉 비취색 바위가 있는 산이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동네 사람들이 발음을 빨리하다보니 샘산이 되었다. 그런데 청암산 아랫 마을인 세장리는 가늘고 긴 마을이라서 세장리라 불리운다. 멀리서 보면 청암산 자락이 열두 폭 치마처럼 넓게 펼쳐져 논과 만나고 논 사이에는 작은 방죽(죽동제)도 있어 넉넉하고 아늑한 마을이다. 옥산저수지(청암호수공원)가 만들어지면서 마을들이 수몰되고 몇 개의 마을만 남았는데 대나무가 많은 댓골이 있다. 댓골 옆으로 가운데 뜸이 있고 그 옆에는 사오개 마을이 있다. 집이 네 다섯 채 있다고 해서 사오개이다. 그 마을에 우물이 있는데 6.25직후 수인성 전염병이 한참 돌 때 이 우물을 먹고 사는 사람들은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근동에 있는 사람들이 물을 뜨러 줄을 섰다고 한다. 이름을 불러주다 보면 그 이름대로 성장하는 사람이 있다. 지역도 특징에 어울리게 이름을 짓기도 하지만 그 이름에 맞게 변해가기도 한다.

  최근 고시명당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학당리는 마을 입구에는 장원탑이 세워져 있다. 회현면에서는 최근까지 사법고시만 10여명이 합격했는데 그 중 절반인 4명이 학당리 출신이다. 사법고시 외에도 고급관료와 행정고시도 5명이 합격하고 기타 학계와 관계에 수많은 인물을 배출한 것이다. 배움에 대한 욕구는 생존욕구와 일맥상통한다. 알아야지 문제해결을 잘해서 잘 살 수 있다. 마을 안에 학교가 있어 이웃집 아이가 공부를 하면 우리 아이도 땡빚을 내서라도 공부를 시키는 부모들의 경쟁 때문일까? 아니면 유전적으로 우월한 집안이 내력 때문일까? 환경이 사람을 만들기도 하지만 사람이 환경을 만들기도 한다. 필요에 의해 학당이 세워지고 학당이 있는 상징성 때문에 많은 학자가 배출이 되니 마을 이름이 그 값을 한 경우이다.

  회현 초등학교 뒷산은 계령산이 있다. 계령산 줄기로 회미읍성이 있어 그 줄기가 회현초 운동장까지 이어졌었다고 한다. 관아가 있던 곳은 대정리 내기로 읍성 안에 있는 마을이어서 내기이다. 그곳에는 현청이 있고 현감이 있었던 곳이다. 대정리 하면 큰 우물이 있던 곳이 아닐까 생각이 떠오르는데 아홉 정승이 나왔다고 해서 불리어진 지명이다. 학당리 쪽에서 대정리로 넘어오다 보면 징기장 고개가 있다. 그 고개를 넘어올 때 거리서 부터 말에서 내려 사또 있는 데까지 기어와야 한다해서 붙여진 이름이고 사또를 만난 뒤에는 가는 길에 말을 타도되는 곳은 선진계라고 불렀다. 그만큼 현청의 사또 위세가 당당할 정도로 큰 현이었다. 현청이 있던 근처에는 큰 우물이 아직도 남아있는데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광이란 말만 들어도 금과 관련 된 동네임을 짐작할 수 있다. 금당과 광지산이 합해서 된 이름이다. 금당이란 금이 나오는 곳이라는 뜻으로 실재 금을 캐낸 굴이 남아있다. 금광리 월평마을은 원당 마을 밖인 산 서쪽 마을로 산을 돌아 간다해서 매바퀴라 했다. 지형이 둥근 달 모양 같기도 해서 일제 강점기에 월평이라고 지었다. 월평 동네 중간쯤에 소모양의 산이 있어 낙산 또는 똥메산이라고 불렀다. 산 서쪽에는 소의 죽통 같은 바위가 박혀 있었는데 일제 때 경지정리를 하느라 바위를 없애 버린 후 몇 년 동안 소가 음메음메 우는 소리가 들렸다고 전한다.

  증석리는 땅이 마치 시루 구멍 같이 움푹진푹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회현은 만경강과 서해바다를 인접하고 있어서 썰물 때가 되면 갯벌이 드러난다. 그 갯벌에 흙을 메우면 농사지을 땅이 되기 때문에 간척을 많이 했다. 그 당시 전국에서 최대의 간척지로 서산과 함께 회현이 손꼽혔다. 간척을 해서 땅을 넓어졌지만 그래도 땅끝마을이다. 

   원우리 용화마을에는 용화산이 있다. 산 꼭대기에 용굴이 있다고 한다. 그 굴에서 불을 지피면 만경강 건너 새챙이에서 연기가 나고 이 굴에서 용이 자라서 승천했다는 전설이 있다. 표산(表山)은 용화산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지형이 바구니 모양 같다고 해서 바그메라고 했고 발음을 박메라고 하다가 표산이라고 했다.

  월연리 오봉마을은 옥구 팔경 중 오봉망해였다. 오봉산에서 망망대해로 지는 해를 볼라치면 선경이 따로 없었다고 한다. 이 산에 옛날에 작은 절이 있었다. 만경강 너머 망해사를 지을 때 스님이 시주를 받으러 오셨다. 가난한 절인지라 드릴 것이 없어 새끼 한 발을 드렸는데 망해사를 다 지을 때 까지 그 새끼를 쓰고 나면 다시 생기고 다시 생기고 해서 망해사를 다 지을 수 있었다고 한다. 작은 정성이 모여서 큰 절을 완성한 이야기이다. 봉우리가 다섯 개가 있던 오봉산은 이제는 한 개 의 봉우리만 남아있다. 네 개의 봉우리를 헐어서 간척을 위한 둑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둑의 이름은 이완용 둑이다. 조선말 이완용은 전라도 관찰사를 노릇을 했었고 백성을 위한다고 간척을 했다. 나라 땅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했던 이완용과 매국노 이완용, 한 시대를 살면서 극한 차이의 행동을 했던 자를 보면서 반성적 사고를 하게 하는 이 또한 역사의 현장이다.

  회현면 8개리의 지명에 얽힌 이야기를 풀어보았다. 각 지역마다 지형에 따른 사람 사는 모습이 다르다. 세월이 흘러 그 지역만의 독특한 문화가 형성되고 역사가 만들어진다. 지명은 선조들의 삶의 이야기를 감아놓은 솔솔 풀어낼 가치가 있는 또 하나의 역사책이다.
/문정현(아리울역사문화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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