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0년대 신흥학교 모습, 1900년 9월 9일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레이놀즈의 집에서 학생 1명으로 학교가 시작됐다./신흥고 제공

일본의 경제보복 등 광복절을 앞두고 아베 정권을 향한 규탄 목소리가 들끓는다. ‘구매하지 않고 여행가지 않겠다’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로 시작된 NO JAPAN 운동은 일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에도 그랬다. 독립이라는 대의에 대열을 이룬 이름 모를 누군가는 역사가 조명한 이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더 많다.

국가보훈처는 74주년을 맞은 광복절을 앞두고 유병민, 문병무, 김경신을 포함해 독립유공자 178명을 포상했다. 그간 소외된 독립유공자를 되새기는 단초가 되길 바라며 이들의 역사를 조명한다.<편집자>

 

유병민(劉秉敏·1885~미상) 선생과 문병무(文秉武·1887~미상) 선생은 신흥고등학교 전신인 신흥학교 교사다.

이들은 1919년 3월 학교와 인근 자택에서 제자인 신흥학교 학생 10여 명에게 “조선은 독립해야 한다”고 역설하며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제자인 김경신(金敬信·1902~미상) 선생은 조선 독립을 역설하는 두 교사의 뜻에 함께해 1919년 3월 13일과 14일 신흥학교·기전여학교 학생, 시위군중과 함께 전주시내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뿐만 아니라 김경신 선생은 동료학생 10여 명과 시내 교회를 순회하며 “독립운동은 종교단체에서 주동했으니, 예수교인들은 예배시간에 독립의 성취와 구금된 애국동포를 위해 하나님께 기원해야 한다”고 연설했다.

이들은 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돼 징역 1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러야 했다. 당시 김경신 선생과 관련해 판결문은 ‘피고 김경신은 1919년 3월 14일 하오 3시 경, 다수 군중과 함께 전주군 전주면 완산정 완산교 부근에서 한국독립만세를 외치고 동면 본정 부근까지 행진해 치안을 방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김경신 선생의 독립운동은 3.1운동 참여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이후에도 1921년 11월 전주 동료의 자택에서 ‘워싱턴회의’(1921년11월12일~1922년2월6일)에 맞춰 제2의 독립만세시위를 계획하다 체포돼 징역 1년을 받았다.

이들에 대한 기록은 판결문과 수형인명부에 남았다. 사제가 하나 된 독립만세의 함성은 지금도 울림을 안기고 있다.

신흥고등학교 조재승 교장은 “신흥학교는 민족과 시대의 흐름 앞에서 지(智), 인(仁), 용(勇)을 실천하는 학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광복절 74주년을 맞은 올해 3.1운동 당시 우리 학교에 계셨던 유병민, 문병무, 김경신 세분이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게 됐다”면서 “이로써 기존 3.1운동 관련 독립유공자로 선정된 고형진(대통령표창·1998), 남궁현(건국훈장 애국장·1990), 김병학(대통령표창·1998), 김점쇠(건국훈장 애족장·2016) 유공자와 함께 당당히 민족정신을 지닌 학교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됐다. 신흥고등학교 전 교직원과 학생들은 선열의 정신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닮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한편 지난 6월 기준 전북 지역 독립유공자는 994명으로 집계됐다./권순재기자·aonglh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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