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은 가운데 전라일보가 주최하고, 지역신문발전위원회가 후원한 ‘전북지역동학농민혁명과 독립운동’ 강좌가 진행되고 있다.
강좌는 지난 4월 박맹수 원광대학교 총장의 ‘전북지역 동학농민혁명과 사적지 분포 현황’을 시작으로 매월 2차례씩 총 10차례 진행됐다.
앞으로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전북인의 국외독립운동’ ‘전북지역 사회활동과 사적지 보고’ ‘전북지역 농민운동과 사적지’ 등 11월까지 6차례를 남겨뒀다.
1년 남짓 전라일보의 사업은 전북인의 동학농민활동과 독립운동에 대해 알림으로써 도민들의 관심을 촉발하고 재평가를 유도하는데 의미를 갖는다. 그간 진행된 강의를 정리해 전북지역 만세운동의 본질을 파악하고 선열들의 독립선언 역사를 끄집어낸다.<편집자>

▲전북지역 3.1운동의 전개와 특징
전북지역은 국내외 유학생들의 활동이 3.1운동을 확산하는 계기가 됐다. 고창의 김성수, 김제의 정노식, 익산의 임규 등은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은 3.1운동 계획 당시부터 서울에서 관계 요인들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만세운동 소식을 전하는 한편 운동의 확산을 위해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뜻있는 인사들과 학생들의 활동은 호남지방 3.1운동 확산에 중심적 역할을 담당했다.
전북지방 3.1운동은 3월 5일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군산, 익산, 전주 등지로 확산됐다. 전북지방 만세운동은 3~4월에 집중됐으며 5월부터 소강국면에 접어들었다. 전북지방 만세운동은 천도교계와 기독교계의 역할이 컸다. 전북지방은 1894년 농민전쟁의 불꽃이 처음 타오른 지역이었던 만큼 3.1운동 직전까지 전주, 정읍, 임실, 정읍, 익산, 금산 등지에 종리원 조직이 두텁게 갖춰졌다. 천도교 조직은 3·1운동 당시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서울 중앙 총부에서 전달된 독립선언서와 3·1운동 소식은 천도교인들에 의해 인근지역으로 빠르게 전파됐으며, 전북지방 3.1운동 확산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천도교계의 활동과 함께 기독교계 학교의 역할도 빼 놓을 수 없다. 전주 신흥학교·기전여학교, 군산 영명학교 등은 만세운동 확산에 큰 물고를 텄다. 이와 함께 일반학교 학생들의 조직적 참여와 군중의 자발적 참여는 전북지방 만세운동의 가늠자 역할을 했다. 기독교계는 학교설립과 함께 ‘제중의원’ 등 의료시설도 함께 보급했다. 이러한 기독교계의 각 기관들은 독립운동에 우호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울 기독교계와 긴밀한 연대로 3.1운동 확산에 밑거름이 됐다. 또한 불교계는 장수군의 백용성(白龍成)이 민족대표에 참여하는 등 만세운동에 일원으로 참여했다.
전북지방 만세운동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주로 장날을 이용해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부분적으로 산상 봉화시위와 만세운동 과정에서 체포된 이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가 이어졌다.
일제 당국은 전북지방 만세운동에 무력진압으로 맞섰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속출했으며, 전북 이리의 문용기의 경우 일제의 무력진압 과정에서 큰 부상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항거하다 순국했다. 전북지방 만세운동은 각계각층이 참여한 거족적 민족운동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이고 있다.

▲전북 3.1운동의 정신과 대한민국임시정부
전라북도 3.1운동의 정신은 동학을 계승한 천도교와 기독교 정신의 통합체라고 할 수 있다. 운동의 주체는 종교와 학생층이었지만 일반민중이 참가한 대규모 항일투쟁이었다. 특히 전주 3.1운동의 주역이었던 김인전은 상해로 망명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의 주역이 됐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이후 1920년 3월 1일 상해 정안사로 올림픽 극장에서 거행된 제1회 독립선언기념식은 한국의 독립관 민족의 자유민임을 선언한 3.1운동의 기억을 소환해서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분투함으로써 적에서 정의의 소재를 알게” 하라고 한 독립선언서의 공약 삼장에 있는 독립의지를 새삼 다짐한 날이었다.
안창호가 1920년 3.1절 축하식에서 “과거 1년간 일인(日人)은 무효에 귀(歸)하려 해 우리는 이날을 유효케 하려 하여싸웠”고 “일인의 최대 문제는 이날을 무효에 귀케 함이오 우리의 최대 의무는 이날을 영원히 유효케 함”이니 “동포여 이날을 유효케 하려거든 그날을 기억하시오”라며 3월 1일을 독립운동의 출발로 기억하자고 했다. 이런 기억은 해마다 더욱 깊어지고 단단해졌다. 1924년 ??독립신문??에서는 3.1절을 “우리 족(族)이 왜적의 패반(覇絆)에서 벗어나고자 해 자유적 투쟁을 실천하는 날이며 세계만방에 민족적 독립운동 개시를 선창한 날”로, 그리고 이듬해 3.1절 6주년을 맞아 상해청년동맹회에서는 “이족의 통치를 타도하고 민족적 독립을 실현하자”는 “위대한 혁명의 서막을 개신한 날이 곧 3월 1일”이며 “지난 7년 동안의 시일은 그 하루하루가 모두 3월 1일의 연쇄(聯鎖)요 계승”이라고 선언했다.
이처럼 1920년대 상해에서 3.1운동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의 독립과 임시정부 수립의 근거이자 독립운동의 원동력으로 인식됐다.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는 현실의 필요에 따라 3.1운동의 기억에서 새로운 담론을 이끌어 냈다. 1921년 3.1절 기념식에서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1921년 3·1절 기념식에서 임시대통령 이승만은 “더욱 결합하고 더욱 융화”할 것을, 학무총장 김규식은 “마음을 단결하고 정성을 합해 밤낮 분투”할 것을 강조했다. 임시의정원 의장 손정도 역시 광복을 위해 “우리는 뭉쳐 하나이 되며 전진하자”고 했다. 이날 기념식에서 3.1운동의 기억에서 소환된 핵심 담론은 ‘대동단결’이었다. 이 담론은 이듬해 3.1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처한 위치를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권순재기자·aonglh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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