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도현 강살리기익산네트워크 대표
 

가을이다. 청명하다. 추수에 분주한 들녘 풍경들이 마치 그림 같다. 가을 햇살에 늘어진 만경강을 보며 지난여름 들녘에서 곡식들을 위해 무겁게 물을 가득 담고 태풍과 폭우를 견디던 강에게 손 모아 경의를 표한다. 오늘은 가을의 강이 태풍도 잊은 채 바다로 이어지는 통로까지 숨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실 같은 물줄기를 품으며 흔들림이 없다.
  가을의 소식에도 아랑곳없이 보수와 진보라는 이름으로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양분된 채 매주 뜨겁게 광화문과 서초동을 달구고 있었다. 지금도 여전히 개혁과 보수, 도덕적인 가치 등 미완의 성공에 목말라 분게 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마음을 보전하고 있는가. 끝없이 다른 길을 바라보고 분한 마음으로 상대를 향해 외치는 모습에서 내 가슴에도 울분(鬱憤)이 쌓여 감을 느낀다. 우리는 지금 울분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인가?
  불신사회, 분노사회, 감시사회, 허기사회,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현상에서 나온 용어들이다. 그런 가운데 `울분사회'라는 단어도 나왔다. `조국사태'라고 일컫는 보수· 진보 간의 신념 차이로 양분 되어 대중집회로 표현되는 주장이 난무함을 빗댄 표현이다. 독일 샤리테대학의 미하엘 린덴 교수는 `상대적인 공정성'이 현대사회의 규정이라고 진단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연구팀의 “울분”연구 분석에 의하면 1990년에서 2018년까지 29년간 일간지 뉴스에 보도된 울분 보도를 헤아려보니 9700건 정도가 기사나 기사 본문에 있었고 울분 보도는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연구원이 최근 울분 연구대상에 참여한 7600여명중 약 44%가 과거와 현재의 생활에서 얻은 만성 울분에 치료중 이거나 고통을 받고 있다고 하니, 우리 사회의 울분이 현저하다는 점은 학계나 사회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문제이다. 울분의 정의는 사회적인 부당함에 대한 감정으로 삶이 불공평하거나 나의 일상이 불공정함으로 나타나는 감정인 것이다. 여기에서 나타나는 상처가 바로 “울”이다. 울은 막힘과 답답함이니 현대사회가 울분 사회가 되어버린 것이다.
   막힘이 없는 강을 바라보며 강을 만들어 준 물에 대한 보답으로 강은 다시 그 자리에 버티어 주는 것처럼, 작금의 이 사태가 우리나라의 미래를 위해 보수, 진보라는 이름으로 명예롭게 토론하고 주장하되 협치하고 서로를 신뢰 할 수 있다면 개운한 가슴 열고 살만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전북의 성자 대산 김대거 종사 법문에 물은 어떠한 덕을 가지고 있는가? 물은 바로 무상(無相)의 덕을 가지고 있다. 더러운 것을 다 씻어 주되 한점의 상(相)이 없으며, 만물을 살려주는 생명의 원천이건만 공성신퇴(功成身退)를 한다고 하였다.
  울이 풀리고 분이 풀리는 사회는 강물처럼 흔적이 없는 베푸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정치인들은 국회 안에서 신뢰를 바탕으로 확고한 본인의 신념이 정의에 무너져도 보고 무효화의 과정을 격으며 상대를 인정하는 수인효과도 필요하다. 상대를 진정으로 이기는 길이 다양함을 멋지게 보여줄 때 국민들은 국회에 거는 기대도 커지고 우리들의 울분이 주는 스트레스에서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다. 가을 들녘 넉넉한 계절이다. 추수가 한창인데 따스한 햇살을 부여잡고 추위가 오는 줄도 모른체 꽃을 피우며 늦호박을 맺는 호박넝쿨에서는 아무리 따먹어도 하루 자고 나면 애호박이 또 열리고, 넝쿨사이에 숨어 숙성한 누런 호박이 한 수레 가득했다,
  라디오에서 가수 박강수님의 노래 가을은 참 예쁘다가 들린다. 하루 하루가 코스모스 바람을 친구라고 하네/ 가을은 참 예쁘다 파란 하늘이 너도 나도 하늘에 구름같이 흐르네/ 조각 조각 흰구름도 나를 반가워 새하얀 미소를 짓고 그 소식 전해줄 한가로운 그대 얼굴은 해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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