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는 명절마다 북적이는 집안 분위기가 귀찮기는 커녕 좋기만 했다. 할머니와 어머니의 구슬땀을 모른척 할 수 없어 부엌일을 고사리 손으로 열심히 거들었다.
집안의 큰 어른인 할아버지에게 인사오는 친척들은 줄지도 않았다. 그 손님들에게 정성껏 내어드린 엿 한접시는 소녀가 먹어도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부엌데기 될 거냐는 어머니의 핀잔에도 할머니와 어머니의 손맛을 어깨너머 힐끗힐끗 훔쳐봤다. 그랬던 소녀의 머리엔 예전 할머니 머리에 내렸던 흰 눈이 앉았다. 고사리 손은 촘촘한 주름으로 채워졌다.
그리고 소녀는 이제 '명인'이 되어 할머니와 어머니의 솜씨를 예스럽게 계승하고 있다. 전국에서는 80번째, 도내에선 12번째 식품명인이 된 원이숙(69) 명인이 그 주인공이다. /편집자주

원이숙 명인을 만나기 위해선 임실군 삼계면을 찾아 깊은 곳 까지 굽이굽이 살펴 들어가야 했다. 삼계면은 몰라도 '박사골 마을'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예부터 여러 분야에 걸친 박사가 많이 배출돼 '박사골 마을'로 불렸던 이 곳에서 30여 년간 쌀엿을 만들고 있는 원 명인은 단순히 명인을 넘어서서 마을을 일으키는 상징 그 자체다.
명인과 쌀엿의 인연은 할머니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웃마을에서도 인사를 하러 들를 만큼 동네의 큰 어른이었던 할아버지와 할머니 밑에서 자란 원 명인은 자연스레 손님상을 차리는 데도 익숙했다.
친할머니인 故조봉순 여사는 명절이나 농한기 때, 집을 찾는 손님들을 위해 동네 부녀자들과 힘을 합쳐 쌀엿을 만들었다. 지금처럼 기계가 있던 시절이 아니라서 아랫목에 뜨끈히 묵힌 강엿을 이웃 아주머니들과 주거니 받거니 늘여뜨리기를 수십차례 반복해야 '먹을만한' 쌀엿이 탄생했다.
할머니가 만든 쌀엿은 입안에 달라붙지 않으면서도 기분좋은 달큰함이 혀 구석구석 도달해 구수한 풍미를 자랑했다. 오래 두고 먹기 위해 콩가루 단지에 차곡차곡 넣어두던 것도 여전히 기억에 생생하단다.
"손님이 올 때 마다 미리 만들어 둔 한과와 쌀엿을 대접했는데 드시는 분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기억이 납니다."
쌀엿을 만드는 풍습은 자연스레 어머니인 故유선순 여사에게 이어졌으며, 어머니와 할머니의 노력을 어깨너머 익힌 원 명인도 운명처럼 이 길을 걷게 됐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 길을 걷고자 했던 건 아니었다고. 시골에서 나고 자랐지만 원 명인은 시골이 싫어 전주로 시집을 갔노라고 웃으며 고백했다.
그러다 25년 전 다시 임실로 귀향한 원 명인은 면단위 회장을 역임하면서 생활개선활동을 펼쳤다.
특히 농업기술원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는 원 명인은 기술원에서 진행한 다양한 교육을 받으며 마을을 살릴 방법을 고심했다.
소박하고 가진 것 없는 고향이라지만 부가가치 산업을 키우고 싶었다. 그러다 어릴 적 할머니와 어머니가 만들어주신 쌀엿이 떠올랐다. 마침 옆 마을에서 엿을 파는 분을 보니 충분히 승산이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할머니와 어머니로부터 어깨너머 본 것은 있지만 제대로 만들기엔 역부족이었던 원 명인은 오랫동안 쌀엿을 만들어 온 고모댁에 가서 정식으로 엿만드는 기술을 배웠다.
마을에도 비슷한 일을 하는 중년 여성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렇게 만들어진 쌀엿을 어떻게 판매해야 할 지에 대한 판로 확보를 고민했다.
"그 때가 2009년이었는데 마침 농촌진흥청에서 지원하는 창의적 손맛 사업의 지원을 받아서 농가부업을 시작해야 겠다는 엄두를 낼 수 있었지요."
지금은 조를 짜서 체계적으로 쌀엿 가공을 이어오고 있지만 처음엔 그냥 오는 사람 하나하나를 붙잡고 가르쳐가며 세를 늘려갔다.
한번도 노동의 댓가를 치르지 않은 적 없다는 원 명인은 동네 사람들에게 일당을 챙겨 줘가면서 일 했던 그시절이 가장 행복했다고 회상했다.
원 명인이 쌀엿 명인으로 거듭날 수 있던 데엔 주변 여건도 한 몫 했다. 특히 남편은 정미소에서 일했는데 쌀은 팔아도 이문이 잘 남지 않는 품목 중 하나였다.
어떻게든 주변과 중개해가면서 팔긴 했는데 밥 짓는 용으로 파는 데엔 한계가 있었다. 남아 돌던 쌀을 가지고 쌀엿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도 그 즈음이었다.
"떡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데 보관성이나 여러 측면에서 떡보다는 엿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론적으로는 엿을 선택하길 잘 했다는 생각도 들구요."
원 명인이 만드는 쌀엿은 특별하다. 외형은 평범해 보이지만 먹어본 사람은 바로 차이를 느낄만큼 맛있다. 깨끗하고 질 좋은 쌀과, 정성을 들여 직접 기른 엿기름으로 셀 수 없이 치대서 만들었기 때문에 '바사삭' 하는 특유의 식감과 감칠맛이 일품이다.
청결을 제 1원칙으로 삼는 원 명인의 철칙상 작업환경부터 엿기름을 재배하는 방식까지 허투루 하는 법이 없다.
그렇게 탄생한, 입에 달라붙지 않는 원 명인표 쌀엿은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간식으로 자리매김해 재주문도 이어지는 상황.
특히, 지난해엔 대한민국 식품명인으로 지정되면서 언론에도 소개가 이어져 더 많은 사람들이 원 명인의 쌀엿을 찾고 있다.
하지만 생산량은 제한적이고, 함께 일하는 동료들의 고령화가 가속화 되면서 순간순간 힘에 부치기도 한다고.
기계화에 부정적이었던 원 명인도 지금은 맛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21세기의 기계기술과 3대가 쌓아 올린 손맛의 융합을 꿈꾸고 있다. 단순히 명인으로 지정되어서가 아니라 쌀엿의 가치를 계승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제는 박사골 쌀엿을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면서 생산량을 늘릴 수 있는 획기적인 방안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하려고 해요. 내 뒤를 이을 젊은 인재도 찾고 있는데 어디 없을까요?"
명인이라는 무거운 왕관을 쓰고도 여전히 소녀같은 원이숙 명인은 오늘도 엿가락을 길게 늘어뜨리며 박사골 쌀엿의 밝은 미래도 함께 길어지길 소망한다. /홍민희기자·minihong2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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