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성·동학 천민부대 홍낙관 수접주와 1907 기삼연 의병장

황토현 승리 후 모양성 점령 죄수 방면, 부정축재 은수룡(제주대정현감)의 집 파괴, 관아 방화, 고리대금업자 관약방 전 감찰 ? 후에 수성군(아전 신재효 아들  전 아전 박건하 화표별장)

▲1894  동학 천민부대 홍낙관 수접주

동학군의 주력 부대는 광대 부대/손태도(문화재 전문위원)

1894년 2월 고부 농민 봉기로 시작된 동학 운동에는 대장이었던 전봉준 이하 김개남, 손화중, 홍계관 등의 두령들이 있었다. 이 중 홍계관이 광대 부대의 우두머리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동학은 신분 제도에 근거한 조선 시대 양반 사회의 해체기와 외세의 침략기에 '사람 속에 하늘을 모시고'(侍天主: 최제우의 가르침), '사람들을 하늘처럼 섬기어'(事人如天: 최시형의 가르침) 이러한 자신을 당시 사회의 '보국안민'(輔國安民)의 주체로 삼는 사상을 지니고 있었기에, 무엇보다도 신분 평등을 우선시했다. 이에 노비들과 역졸(驛卒), 무부(巫夫), 백정 등 천대받고 고통 당했던 천민들이 특히 이 동학 운동에 많이 들어와 새 세상을 이루고자 했다. 이 중 창우(倡優), 재인(才人), 무부(巫夫) 등으로 기록된 경기 이남의 광대 집단인 세습 무당 집안의 남자들이 이들 동학군들의 실제적인 주요한 전투 부대원들이었다. 이러한 사정을 다음의 기록들이 말해 주고 있다.

"처음에 김개남은 도내의 창우(倡優)·재인(才人) 천여 명으로 일군(一軍)을 만들어 그들을 두터이 예우해서 그들의 사력(死力)을 얻음을 도모하였다......
처음에 손화중은 도내의 재인(才人)을 뽑아 1포(布)를 조직하고 홍낙관으로 하여금 이를 지휘하도록 했다. 홍낙관은 고창의 재인으로서 손화중에 속하여 그 부하 수천 명이 민첩하고 정예병이었으므로 손화중이 비록 전봉준, 김개남과 정족지세(鼎足之勢)에 있었다 할지라도 실제로는 손화중의 무리가 최강이었다." 황현, 『오하기문』

동학군뿐만 아니라, 관군에서도 이들 광대 집단은 주요한 전투 부대였다. 당시 광대들은 솟대타기, 줄타기, 땅재주 등의 기예로 몸이 날랬으며, 관가에 들어가 악공 등을 하며 관청의 여러 일들도 잘 알고, 아래로는 세습 무당 집안 사람들로 민가의 사정들도 잘 알면서 눈치가 빨랐다. 또한, 이들 중 상당수는 감영이나 병영의 취타수(吹打手)들로 실제 군사 일들에 태평소, 나발, 북, 징 등을 연주하였기에 군사적인 일들에 상당한 소양이 있었다.

한편, 손화중 예하 광대 부대 대장이었던 홍낙관은 동학 운동 전기간 동안 사력을 다하다 동학군이 완전히 해체된 1895년 1월 전봉준, 순화중 등과 함께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됐다.
현재 전주의 판소리 원로로 있는 홍정택(1921년생) 선생은 "저희 증조부의 함자가 홍필현, 큰할아버지의 함자가 홍낙관, 조부님의 함자가 홍계관, 부친의 함자가 홍순열입니다. 저희 증조부님이 동학 혁명 당시 흰 덩(큰 가마)을 타고 대장을 하셨답니다. 전주 완산 7봉에서 전사를 하셨는데 거기에 지금 비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증조부님이 총을 맞으셨는데, 조부님이 업고 내려오셨답니다. 그런데 증조부가, '나를 구하려다 너까지 죽는다'며 발로 걷어차 조부만 혼자 살아오셨답니다...부친은 고창서 살 때 외가의 성을 따서 '김씨'로 했답니다.

어떤 사람이 '그 많던 광대들은 어디로 갔을까?'란 제목으로 광대에 대한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많던 광대들의 상당수는 이러한 동학 운동에서 선화(仙化)했다. 그리고 나머지 사람들도 대부분 그들의 고향을 떠났다. 동학 운동이 한창이던 1894년 6월 정부는 갑오경장을 단행해 신분 제도를 철폐했다.

◆기삼연 의병장과 고창읍성 전투(1907년 10월 31일~11월 1일)/홍순권(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고창 문수사 전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한 인물이 있다. 김준(金準)이다. 그는 24세 되던 해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나자 일시 동학농민군에 가담하기도 했었다. 을사늑약 이후 김돈(金燉) 등과 거의를 도모하던 중 기삼연의 거의 소식을 듣고 동지 10여 명과 함께 문수사로 찾아갔다.

문수사에서 일병들의 기습을 당했으나, 그 날 야간 전투에서 김준이 큰 공을 세웠다. 갑작스런 적의 기습으로 의병들이 크게 당황하자 김준은 의병들의 동요를 잠재운 후 직접 돌담에 기대어 침착하게 총을 쏘아댔다. 의병들이 전의를 회복하고 반격하자 마침내 적들이 오히려 당황하여 마침내 퇴각하고 말았다.

문수사 전투 후 김준의 군사적 지식과 대담성을 높이 산 기삼연은 그를 선봉장으로 임명했다.

조직을 정비한 기삼연은 막하 장수들과 향후 전략과 일정을 계획한 후 전국에 격서문(檄書文)을 띠웠다. 기삼연은 이 격문에 왜놈의 머리 1개를 베면 돈 1백냥, 순검이나 일진회원이 왜놈 1명의 목을 베면 죄를 면해주고, 2명의 목을 베면 상으로 1백냥을 주겠다고 공고했다.

기삼연이 의병들을 이끌고 고창에 입성한 게 10월 31일(음력 9월 25일)이다. 기삼연의 의병진이 입성하자 고창읍민들은 술과 고기를 가져와 이들을 대접했다. 새벽녘 일병 한 부대가 어둠을 뚫고 고창성 안으로 기어들어와 무차별로 사격을 가했다. 가까스로 기삼연, 김준, 유인수 등이 전열을 정비하고 주민들마저 가세하니, 적병들이 도망하기 시작했다.

◆성송면 괴치리 ? 최고 인기 대접주 손화중 도소

손화중 (1861-1895) 본관은 밀양(密陽)이며, 이름은 정식(正植), 자는 화중(華仲)(또는 和中·化中), 호는 초산(楚山)이다. 1861년 정읍현 남일면 과교리(현 전라북도 정읍시 과교동)에서 태어났다. 12세 때 고흥유씨(高興柳氏)와 혼인해 손병두·손성선·손성태(일명 손응수)·손성한 등의 자식을 두었다. 20대에 처남 유용수(柳龍洙)(1863~1895)를 따라서 십승지지(十勝之地)를 찾아 지리산 청학동에 들어갔다가 그곳에서 당시 일대에 널리 전파되고 있던 동학에 입교(入敎)하게 됐다. 동학에 입교한 지 약 2년 뒤 고향으로 돌아와 고향을 중심으로 포덕(布德)을 시작했다.

전북 부안에서 시작된 손화중의 포덕 활동은 정읍 농소리(현 정읍시 농소동), 입암면 신면리, 음성리 본가를 거친 뒤, 이윽고 무장현를 근거지로 삼으면서 활발하게 전개됐다. 손화중은 동학 농민 혁명이 시작되자 양실마을의 이웃인 괴치리 최부자집(현 고창군 성송면 괴치리 276-1번지)으로 도소를 옮겼다.

농민 전쟁이 잉태되고 있을 무렵 무장과 고창을 비롯해 이웃 고을에서도 남녀노소 불문하고 손화중의 명성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1892년 전라북도 삼례에서 교조 신원 운동이 일어나자 손화중은 많은 동학 교도들을 동원해 여기에 참여하게 했다. 또한 재인들로만 구성된 특별한 포를 만드는 등 전라도 일대에서 가장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이용해 삼례 집회 해산 후 동학 교도들이 무장군수에게 뺏긴 지목전 1,000냥을 회수하는 등 강력한 동학 조직의 힘을 보여줬다. 1893년 서울 광화문에서 복합 상소가 이루어질 때는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으며, 충청북도 보은에서 열린 장내리 집회에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등 동학 지도자로서의 능력을 발휘했다.

1894년 1월 10일 1,000여 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약 두 달여에 걸쳐 고부 농민봉기를 주도했던 전봉준(全琫準)이, 고부 봉기를 진압하러 온 안핵사 이용태의 탄압을 피해 3월 13일경 손화중의 근거지인 무장으로 피신했다. 손화중은 처음에 전봉준의 전면 봉기 주장에 대해 동의하지 않았으나 전봉준의 끈질긴 설득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게 된다.

1894년 3월의 제1차 동학농민혁명에서 손화중은 김개남(金開南)과 함께 총관령을 맡았으며, 전주화약(全州和約)에 이어 전라도 각 군현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농민군이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수행해 나갈 때는 나주·장성을 중심으로 서남부 일대를 통솔했다. 당시 손화중은 34세로 전봉준보다 6세 연하였고, 김개남(42세), 김덕명(金德明)(50세), 최경선(崔景善)(36세) 등 다른 대접주와 비교할 때도 최연소자였다. 집강소시기에는 일본 상인이 많은 포구에 방곡령을 내렸다. 일본으로 쌀이 수출되면서 쌀값이 폭등하고  백성들이 기근에 시달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일본상인에게 쌀 판매를 금지시켰다. 또 부호들의 쌀과 명례궁답 도조쌀을 시중에 싸게 방매해 쌀값을 하락시켜 식량 안정화 방책을 폈다.

가을 봉기 이후 손화중은 일본군이 남해안 쪽으로 상륙해 올 것에 대비해 북상하는 농민군에 합류하지 않고 최경선과 같이 전라남도 나주와 광주 지역을 지켰다. 남접·북접 연합 농민군이 공주 공방전에서 패배한 뒤, 그는 나주를 포위하고 수차례 점거를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관군·일본군·민보군 연합 세력에 의해 농민군이 각처에서 패배 당해 대세가 기울어진 것을 안 그는 1894년 12월 1일 농민군을 해산했다.

농민군을 해산한 손화중은 1894년 12월 11일 전북 흥덕의 수강산 산당 이씨 재실에서 재실지기 이봉우의 고발로 관군에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다. 1895년 3월 손화중은 전봉준·김덕명·최경선·성두환(成斗煥) 등과 함께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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