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수내 - 1894년 무장 기포와 1919년 무장 3.1 만세운동

고부 봉기 후 전봉준 장군은 무장에 와서 손화중을 설득한다. 이에 강경중과 청송역에서 3천명이 봉기한다. 3월 16일부터 죽창을 무기로 사용한다. 구적산 아홉 골짜기 시냇물이 모여 석교 법성포로 가는 길목 넓은 냇가(구수내)에 버드나무 우람하고 흰 모래사장은 수천명이 모일수 있다. 농민군이 진을 짜고 훈련하는 석교에는 백산처럼 세금으로 거둔 쌀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어 군량미와 물자 조달에 유리하다. 교통의 요지 정읍, 고부, 전주, 영광, 법성포, 나주, 장성으로 이어진 길이고, 바닷배들이 석교까지 오가서 해상교통에도 유리하다. 안핵사 이용태의 고부 만행으로 무장 기포가 일어나는데, 3월 20일(무장 장날) 집결해 3월 21일 출발(해월법헌 생신)한다.

▲갑오년의 이순신 무장 접주 송문수

송문수 접주는 은진송씨로 9척 장신에 수염이 위압적인 풍모로 성격이 엄격했다. 4월 무장 기포에 동생과 함께 봉기했다. 구수내 버드나무 모래밭을 동학군 연병장으로 사용했고, 장사꾼으로 변복해 동학군을 훈련시켰다. 외부 인사가 방문할 때는 구수내 장터에 난장을 터서 위장했다. 그해 10월 일본군에 맞서 7천 농민군을 이끌고 영광으로 진출했다.

송문수는 배를 타고 전라도 일대 해역을 장악했다. 당시 조선은 좌수영, 우수영, 목포, 고금도, 군산 등 여러 항에 모인 세금을 전운사 소속의 기선인 한양호를 통해 중앙에 납부하도록 했는데, 이 때 동학농민군이 이를 습격했다. 송문수가 이끄는 선박 4척을 필두로 전라도 수역 일대를 휘젓고 다녔다. 영광에서 배를 타고 세곡선 일본 선장을 생포하고 진도까지 박중진과 진출했다.
1894년 4월 농민군은 법성포 인근 영광군을 점령했고, 한양호를 습격해 나포했다. 이에 전운사 조필영은 급히 초토사 홍계훈에게 강화도 심영 소속 병력을 보내서 법성포를 방어해달라고 요청을 할 지경이었다.
1894년 10월 농민군의 선박 운용은 송문수의 지휘로 4월 봉기 당시와 마찬가지로 상당히 공세적으로 운용했다.
송문수는 영광군을 중심으로 각 진읍의 군수물자를 탈취하고자 선박 4척으로 전라도 서남부 해안과 도서 지역으로 진출했으며, 심지어 진도군의 수영 등지까지 활동 영역을 확대했다. 주로 이들은 선박을 나포하고 식량과 자금, 무기를 뺏어오기로 했는데, 동시에 일본군이 해로를 통한 협공을 하지 못하도록 해안 방어에 주력하는 것도 있었다.
송문수는 동학군에서 민보군으로 갈아탄 영광 흥농 이현숙에게 12월 5일 잡혔다. 영광 활터에서 이현숙의 지시로 백정에게 참수됐다. 목은 관아에 걸리고 목 없는 시신만 고향마을 맞은편 대숲에 몰래 묻혔다. 장성으로 시집간 딸이 밤을 틈타 와서 울면서 벌초했다. 술병 하나를 든 사내들이 송문수 아들과 함게 대숲으로 들어가 말없이 그 무덤 앞에 절 올리고 송문수를 잊지말라 이야기했다.

▲무장 만세운동과 대한독립단 비밀결사대 박영관(1899- 1975) 선생

?1919년 3월 전북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 284번지 박영관(21)은 자택에서 중앙에서 온 예수교 선교사 송주일씨를 만나 만세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3월 1일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고 온 무장읍내 유지 김영완씨로부터 입수한 독립선언서, 국민휘보, 조선독립가 등을 학교 등사판에 다수 복사해 보관하고, 읍내 유지 및 지식층과 비밀리에 뜻을 규합, 기미년 3월 15일 무장읍내 장날을 기해 일제히 거사하기로 결의했다.
3월 15일 무장면 동명보통학교 학생과 무창학교 학생 민간인 등 약 400여 명과 만세 시위에 나섰다. 송주일 선교사는 학생 20여 명과 청년들에게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국민휘보, 조선독립가 등을 나누어 주고 박영관 동지는 선두에 서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부르며 행진했다. 왜경 10여 명이 출동해 곤봉을 휘두르며 저지했다. 선두에서 지휘하던 박영관 동지가 왜경의 포승줄에 목이 걸려 체포되기 직전 왜경의 눈을 구타하고 왜경이 실신한 순간 피신했다. 이후로 평생 고향에 안착하지 못했다.

그길로 도주했고, 1923년 3월 목포시 죽동에 있는 관해여관에서 평안북도 의주 출신 조인현 동지를 만나게 된다. 대한독립국 통의부 소속으로 '조선독립의 선전', '군자금 모집' 및 '동지규합'을 목적으로 조선 내에 잠입한 사실을 조인현에게 듣자 통의부에 가입하고 조국광복 투쟁을 맹세했다. 동지들을 모아  전남 장성군 산간벽지 초막집에 은거지를 정하고 투쟁 활동 계획을 세운다. 군자금을 모집하기로 결의하고 전남북 부호들에게 군자금을 찬조 받아 1924년 3만원을 상해임시정부로 보내는데 성공하고, 수차에 걸쳐 총액 7만5천 원의 군자금을 보냈다.
자신을 얻은 투사들은 대대적으로 조직을 확대해  전남북 지방에서 왜놈들의 금고를 습격하기로 한다. 또, 지폐 위조, 폭탄 제조, 권총 및 탄환을 수입하기로 했다. 관공서, 은행, 일제의 한국인에 대한 착취기관인 동양척식회사 이리지점(이리 동척)을 파괴 및 습격해 군자금을 마련한다는 계획이었다. 폭탄제조 기술사까지 초빙해 실행하려던 차에 동지들이 발각, 체포당해 목포형무소에 수감되고 곧 이어 나머지 9동지도 모두 체포당했다.
  
박영관 선생은 서기 1928년 4월 17일 체포된 후 전주형무소로 압송돼 갖은 고문(전기지짐, 가죽조끼, 땀방울 구타 등)을 당하고 3개월 마다 예심을 갱신하길 12회에 종결돼 1930년 3월 5일 공판에서 1년 언도를 받고 1931년 11월에 만 3년 7개월간의 옥고를 치루고 반신불수가 된 몸으로 출감했다. 38세 늦은 나이에 혼인, 전남 장성에 정착했으나 고문 후유증과 생계의 곤란을 겪었다. 살아생전 자신의 독립운동 행적을 입밖에 내지 않았다. 동아일보에 15차례 넘게 실린 재판 기록을 후손들이 모아 독립유공자 신청을 했고, 사후 15년인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2014년 기념사업회가 발족돼 공적비를 세웠다. 2017년 목포형무소 복역 기록을 발견했다. 2018년 전북 고창군 무장면 도곡리 284번지 시목동 마을 생가와 공적비가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됐다.

◆전봉준 생가와 녹두장군

동학농민혁명의 핵심 인물이자 주도자였던 전봉준 장군은 1855년 전북 고창군 고창읍 당촌리 63번지에서 아버지 전창혁, 어머니 광산김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자(子)는 명숙(明淑), 호(號)는 해몽(海夢)이고, 관(貫)은 천안(天安)이다. 혁명의 지도자 전봉준 장군은 오척단신의 작은 체구 때문에 녹두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버지 전창혁이 고부군수 조병갑의 폭정으로 목숨을 잃었다. 탐학에 울부짖던 백성들이 장두로 세워 고부봉기를 일으켰다. 안핵사의 만행으로 고부가 불타고 도륙당했다. 전봉준 장군을 비롯한 동학농민 지도부는 1894년 3월 20일(음력) 동학농민혁명 발상지인 무장기포지(전북 고창군 공음면 구암리 구수내 마을)에서 4,000여 명의 농민군이 모인 가운데 무장창의 포고문을 선포하고 조직적인 항쟁에 들어갔다. 또한, 동학농민군은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농민군의 4대 강령을 발표하고 조직적으로 투쟁을 전개했으며, 집강소를 세우는 등 농민자치를 실천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전봉준 장군은 동학농민군을 규합해 최후 전투였던 우금치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였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 패하고 말았다. 이후 전봉준 장군은 재기를 계획했으나 갑오년 12월 2일 밤에 체포돼 그의 나이 41살이었던 1895년 3월 30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살려주겠다는 일본의 회유에 굴하지 않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재판 과정에서 봉기와 기포 혁명의 과정과 뜻한 바를 밝혔다.
동학농민혁명은 당시 봉건체제의 모순이 심화된 가운데 농민층이 가혹한 수탈과 억압에서 벗어나고자 항거한 농민전쟁이었고, 당시 위정자의 각성은 물론 갑오개혁의 도화선이 됐으며, 척양척왜와 보국안민의 기치를 높이 세운 최초의 민중항쟁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내 3.1운동 - 흥동장학당과 2.8선언 백관수

흥동장학당은 1931년 근촌 백관수, 백낙윤 등 96명의 흥동장학계원들이 상해임시정부에 보낼 독립군자금 모집과 인재 양성 등 항일 운동을 위해 지은 건물이다.
흥동장학계는 한일 병합 후 1914년 부안 내소사에서 근촌 백관수 선생이 친지 백낙윤 등과 함께 항일독립투쟁을 위해 만든 모임으로, 성내면에서 82명,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 14명의 회원을 모집했다. 고창지역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고(흥동장학당이 있는 성내만세운동은 사전 발각으로 불발),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전달했으며, 장학계원들이 출자한 자금으로 성내보통학교와 고창고보의 설립을 후원하는 등 민족교육진흥과 장학사업을 펼쳐 반일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
학당의 건물은 앞면 6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을 얹었다. 흥동장학계를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의 거점 및 민족교육의 터전으로서 역사적 의미를 지니며, 건물 자체에서도 단정한 품격이 느껴진다. 비교적 전통적 수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2014년 7월 18일 국가보훈처에서는 A급사적지 현충시설로 지정했다.<출처: 문화재청>

▲적국의 심장에서 밝힌 자유와 평화의 선언 - 2.8 독립선언과 백관수 선생

근촌 백관수 선생은 1889년(고종26년) 1월 28일 고창군 성내면 덕산리에서 태어났으며, 여섯살 때부터 호남의 거유인 간재, 전우의 문하에서 한문을 익혔고, 22살 1910년 한일병합으로 나라 없는 백성이 됐다. 31세에 일본 유학 중 2.8 일본 유학생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서명해 일본 경찰에 잡혀 옥살이를 했다.
1917년 봄 일본 명치대학 법과에 입학한 후 그곳에서 독립운동 대책위원으로 뽑혀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연행, 1년동안 옥고를 치렀는데, 2·8선언은 20일 뒤의 3·1운동을 촉진함으로써 실로 독립운동의 선구자 역할을 했다.
1920년 3월 출옥한 그는 귀국해서 기독교 청년회와 언론계에 투신해 이상재와 더불어 조선일보의 이사와 영업책임자, 편집 등을 맡아 약 4년간 근무했다. 그가 주동한 2·8선언의 전모를 이미 상세히 알고 있는 이승만은 독립운동을 함께 하자고 간절히 제의했지만 거절했다.
1937년 5월에는 동아일보사 제7대 사장에 취임했었다.
1947년 민주대표자 대회를 거쳐 1948년 5월 10일 제헌 국회의원을 거쳐 향리인 고창에서 당선돼 초대 법사위원장 및 헌법 기초위원으로서 한국정치의 중심부에서 크게 활약했던 그는 1950년 62세의 나이로 원남동 자택에서 공산군에 의해 납북당했고, 생사여부는 끝내 알 길이 없다.

"..... 우리 미족은 정당한 방법으로 우리 민족의 자유를 추구할 것이나 만일 이로써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생존의 권리를 위해 온갖 자유행동을 취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자유를 위하여 뜨거운 피를 흘릴지니 이 어찌 동양평화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우리 민족에게는 한 명의 병사도 없다. 그러나 일본이 만일 우리 민족의 정당한 요구에 불응할진대 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을 선언하노라.(중략)  우리 민족은 일본이나 혹은 세계 각국이 우리 민족에게 민족자결의 기회를 주기를 요구하며, 만일 그렇지 않으면 우리 민족은 생존을 위하여 자유의 행동을 취하여 이로써 독립을 이룩할 것을 선언하노라." - 2.8 일본 유학생 독립선언서 중에서./최은희 작가(지역출판 '정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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