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희 전주역사박물관장
코로나19가 걷잡을 수 없게 확산되고 있다. 확진자가 집중적으로 나오고 있는 대구지역은 의료시설 부족으로 확진자가 병원에서 치료받지 못하고 자가 격리되는 상황들이 벌어지고 있다. 봄 꽃소식에 설레고 선거 하마평이 무성할 시기에 신종 바이러스는 전국을 긴장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있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숙종 44년(1718) 2월 1일, 충청도 각 고을의 백성들 가운데 전염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6천 4백 85명이고, 사망한 사람이 1천 4백 54명이라고 충청감사가 보고하고 있다. 정확한 수치인지는 몰라도 이 정도의 환자와 사망자가 나왔다는 것은 엄청난 일이다.
이에 세자가 다음과 같이 명하였다. “전염병이 극심해 사망한 사람이 이와 같이 많으니 매우 염려스럽다. 바야흐로 병을 앓고 있는 자는 제때에 즉시 출막(격리) 시켜서 전염되지 않게 하라. 그중에서도 가장 심한 고을에는 각별히 구호할 것을 단단히 이르라고 각도에 분부하라."
조선시대에 역병이 몰아치면 한 고을이 쑥밭이 되었고, 구호를 한다고 하지만 의학의 한계와 열악한 의료시설로 속수무책이었다. 환자를 격리시키고, 해당 관리들에게 특별히 구호에 신경 쓸 것을 명하는 등 안간 힘을 썼지만 역병에 맞서기는 역부족이었다.
조선시대 서울에는 의료를 담당하는 관서로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 활인서 등 네 곳이 있었다. 이 중 치료기관이라기 보다는 역병환자의 격리 시설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 활인서이다. 그런 연유인지 활인서는 도성 밖인 동소문 밖과 서소문 밖에 자리하였다.
내의원은 왕실 의료를 담당했고, 전의감은 양반 관료들의 의료를 담당했으며, 혜민서는 도성내 거주민들의 의료를 담당하였다. 조선후기에는 또 상업의 발달로 서울에 많은 의원과 약국들이 성행했다.
이에 비해 지방은 의료시설이 부족하였다. 향촌의 양반들은 평소에 약재를 준비해 두었다가 가족, 친지, 이웃, 친구 등이 병이 나면 서로 부조하였다. 조선후기에도 지방의 의료 형편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상민계층은 병이 나면 무당에게 의존하는 형편이었다.
조선후기 지방에 약령시가 들어서지만 약재 구하기가 여전히 어려웠던 것 같다. 3대 약령시가 대구, 전주, 원주 약령시이다. 이중에 대구 약령시가 가장 컸다. 전주는 구도청 앞이 약전거리로, 이를 알려주는 비가 길가에 있다.
진도에 유배 갔던 김약행의 유배일기는, 비록 섬이기는 하지만 역병과 지방의 의료실정을 잘 보여준다. 그는 1767년(영조 43) 50세의 늦은 나이에 알성시에 급제하여 순천부사를 지냈던 인물이다. 그는 여러 차례 유배를 갔는데 진도로 유배간 것은 64때의 일이다.
그가 기거했던 집주인 윤연홍의 딸이 학질에 걸렸다가 부부가 전염되어 둘 다 죽었다. 진도 금갑진에 유배 와서 처음 기거했던 윤동우의 집에서도 아들과 손자가 역병으로 연이어 죽었다. 그도 풍토병에 걸려 배가 공처럼 불러와도 약을 구하지 못해 낙담하고 있다가, 아는 사람에게 부탁해 겨우 약을 구해 치료할 수 있었다. 그는 8년여 유배생활 끝에 생을 마감했다.
그의 진도 금갑진 유배생활은 궁핍했다. 아침에는 밥을 먹고 저녁에는 죽을 먹었다. 주인집에서 떡을 하자 떡을 하나 보내줄까 기대하다가 결국 얻어먹지 못하기도 하고, 정초부터 굶기도 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상이 마비되다시피 하고 있다. 어떻게든 이 사태를 진정시키는 것이 급선무이다.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는 보건당국과 의료계에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 방역과 대처를 놓고 책임을 논하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다. 지금은 힘을 모아 코로나 극복에 정진할 때이다.
그런데, 대구지역에 대학이 많고 병원도 많아서 이 정도라도 추스리고 있지 전주지역에서 일이 터지면 큰 일이라는 염려가 있다. 이번 사태가 진정되면 우리 지역 의료계 실정도 돌아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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