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색(色)이 있었다.
  색은 인류역사의 발전과 훌륭한 예술을 창조하여 위대한 공헌을 하였으며, 인간의 정조(情調)와 생운(生韻)과 이별과 만남에도 색깔이 있다. 때문에 색깔이 푸른 지구에서는 인간의 시(詩)가 소리(음)를 입을 때 음은 색을 쓴다.
  고로 인간의 말은 곧 음이다. 시란 말(소리)을 리듬이라는 음악성을 절대로 필요로 한다. 음이 색을 쓰기 때문에 시 또한 불가불 색을 입어야한다. 어째서 우리 선조들은 여인을 색으로 표현하였을까?
  주인공 상훈과 하영은 웃어른의 색으로 인하여 몸쓸 운명에 놓인 인간상이다. 그러나 색은 여인처럼 모든 걸 안아주고, 품어주고, 받아주어 새 생명을 찬생시키는 우주의 섭리와 같은 모체이기 때문에, 여인을 색으로 표현했을 것이다.”(후기 일부)
 

원로시인 조기호가 서정시 같은 장편소설 <색>(바밀리온)을 펴냈다.
  저자는 “시도 소설도 자서전도 아니다. 소설 흉내를 내어본 글에 시를 얼버무린 꼴의 어설픔을 엮었다”는 겸양을 보이지만 오랜 시간 시를 다루었던 깊은 내공이 실려 있다.
  소설은 근현대 역사를 관통한다.
  특히 일제의 압제와 해방공간 좌우익이 대립하던 시절을 넘어 한국전쟁. 그리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보수와 진보간 벌어지고 있는 색깔 논쟁을 정면으로 받아 친다.
  앞서 저자는 자서전이 아니라고 강조했지만 주인공 상훈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은 그의 어린 시절과 유사하며 저자가 평소 자주 들렸던 곳이 소설 속 배경으로 등장한다.
  색의 논쟁 속에 어린 시절을 겪었던 저자는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이 경험하고 느꼈던 옛 과거의 기억들을 소환한다.
  자서전이 아니라고 하지만 짙고 농후한 자서전적 경험이 소설의 근본 바탕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일제시절 일본인들의 수탈, 조선말 말살정책과 전쟁으로 인한 배고픔, 갖은 수모와 공출 같은 잃어버린 것들을 일러주고 이승만 정권의 사회부패 상황도 끄집어냈다.
  또 4.19와 5.16을 견디고 살아온 힘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 세대를 겪지 않은 이들에게 전해주고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생채기를 보여준다.
  민족간 비극도 빠트리지 않았다.
  해방이후 강대국들은 순박한 땅에 선을 그어놓고 이데올로기란 색깔로 우리를 세뇌시켜 편을 갈랐다.
  그들의 대리전쟁이 한국전쟁이다. 동족끼리 겨눈 총부리가 당시 인구의 일할이 넘는 300만명의 목숨을 빼앗아 갔고 강산은 처참하게 부서졌다.
  총성이 멎은 지 67년이 된 지금도 남북으로 나뉘고, 그것도 모자라 빨강, 하양, 노랑, 파랑, 같은 색깔로 나눠서 보수네, 진보네 하며 대립하고 있는 현실.
  저자는 “남, 남, 갈등으로 치고 박고 대가리가 터지는 싸움으로 허송세월 개지랄을 하고 자빠져있는 색깔의 의미를 반추해 본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주탐사전 보이저 1호가 명왕성 부근에서 촬영한 지구는 ‘창백하고 푸른 점’의 티끌이라는데, 이 작은 티끌 속에서 남들이 가져다준 색깔 싸움이 무슨 의미냐”고 반문한다.
  전주 출생으로 문예가족을 비롯해 전주풍물시인동인, 전주문인협회 3~4대 회장을 역임했다.
  시집으로는 ‘저 꽃잎에 흐르는 바람아’, ‘바람 가슴에 핀 노래’, ‘산에서는 산이 자라나고’, ‘가을 중모리’, ‘새야 새야 개땅새야’, ‘노을꽃보다 더 고운 당신’, ‘별 하나 떨어져 새가 되고’, ‘하현달 지듯 살며시 간 사람’, ‘묵화 치는 새’, ‘겨울 수심가’, ‘백제의 미소’, ‘건지산네 유월’,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꿈꾸었네’, ‘아리운 이야기’, ‘신화’, ‘헛소리’, ‘그 긴 여름의 이명과 귀머거리’, ‘전주성’, ‘민들레 가시내야’, ‘이별백신’ 등이 있다.
  목정문화상, 후광문학상, 전북예술상, 시인정신상, 표현문학상, 전북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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