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를 통해 역사적 인물을 접할 때면 그 인물의 과거를 더 자세히 알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국민 중 가장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인 이순신 장군의 기록을 읽을 때면 더욱 그러하다.
이순신의 일대기를 책을 통해 감명을 받았다면 그를 기억하고 되새겨볼 수 있는 곳을 찾아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지역에서 이순신 장군을 기억할 수 있는 곳 바로 정읍에 위치한 충무공원이 있다. 충무공원에는 이순신 장군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 충렬사가 있다.

▲충렬사와 충혼탑이 있는 충무공원
정읍시청 바로 옆 성황산에 충무공원이 있다. 시청에 주차하고 사잇길을 따라 충렬사로 향하면 길이 보인다. 입구의 안내도를 숙지하고 홍살문을 지나 충무공원 표지석이 있는 완만한 길로 들어선다. 돌아가는 길에 있는 계단은 충혼탑으로 가는 길이다.
효충문으로 들어서니 공간이 생각보다 넓다. 사당 뒤편으로 산자락을 에둘러 담장을 쌓았는데, 담장은 무덤을 형상화하고 있다.  사당의 문은 평상시 잠겨 있지만, 원하는 사람에게는 기꺼이 문을 열어준다. 방문 목적을 말하면 관리인에게 또 다른 역사 이야기를 들을 수 있으니 기회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이순신 장군 사당은 현충사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이순신 장군’하면 현충사를 떠올리는데 이순신 장군을 모신 사당은 전국에 여러 곳이 있다. 여수, 해남, 남해, 통영 등 한려수도에 주로 많고, 장군이 어린 시절을 보낸 외가가 있는 아산에 현충사가 있다. 이쯤 되면 정읍에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 있는 이유가 궁금해질 법도 하다.
이순신 장군은 여진족과 대치하던 함경도 국경 마을 만호로 전근 갔다가 3년 후, 1589년 말 46세에 정읍 현감으로 부임했다. 이후 1년 4개월간 선정을 베풀다가, 임진왜란이 있기 전 1591년 전라 좌수사로 임명됐다.
이순신에 대한 인사발령은 극심한 파행을 보였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인연으로 정읍 진산동 유애사에 충무공의 위패를 모셨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 유애사가 헐리고, 해방 후 1949년 일본 신사가 있던 현 위치에 충렬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각계의 성금으로 세우다 보니 재정 부족과 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돼 14년에 걸쳐 완공됐다. 1963년 4월 이후 1985년에 효충문과 선양루가 세워져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충렬사 깊이 들여다보기
사당 문이 열리고 햇살이 바닥을 비추자 떨어진 흙 부스러기가 눈에 띈다. 영정과 위패가 있는 전면 두 개의 문을 여니 영정 사진도 모습을 드러낸다. 소설 속 서릿발 같은 장군의 모습은 간데없지만 숙연해져서 잠시 고개를 숙이고 참배를 해본다.
이곳에 있는 영정은 표준 영정으로 장우성 동양화가의 상상화이다. 징비록에 실린 묘사와 충무공 13대손을 모델로 그렸다고 한다. 화가의 친일 행적과 복식 고증 오류 등 논란이 있지만, 현재는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모습이다.  자연스럽게 시선을 천장으로 옮기니, 두 마리 용이 마주 이순신 장군을 호위하고 있는 듯하다.
건물의 전면 위에는 가로 현판이 있다. 유애사에는 왕이 내린 현판이 있었는데, 불에 타 새로 현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건물 외벽에는 글이 적힌 네 개의 세로 기둥이 있다. 주련이라고 부르는데, 정인보 선생이 쓰신 글이라고 한다.
충렬사 뜰로 내려와 창건기념비가 있는 곳으로 가보면 비석이 있는데 비석 뒤에는 난중일기를 번역한 이은상 시인이 쓴 글귀가 새겨져 있다. 비문의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사당을 세우기 위해 애쓴 정읍 유생과 충무공을 기리는 이들의 성심을 읽을 수 있다.

▲충무공원의 요모조모
충렬사를 나와 왼편 계단을 오르면 박준승 선생의 묘소를 지나게 된다. 박준승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북면 마장리의 유해를 이곳에 이장했다.
‘거룩한 얼’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충혼탑 앞에 서보자. 한국전쟁 때 산화한 고장의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이다. 탑 뒤에는 위패 봉안소가 있다. 충무공원이야말로 역사교육의 산 현장이다.
뒤편 체육공원으로 가는 길이 있지만, 옆으로 난 데크길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충렬사 뒤편 숲을 지나는 길로 잘 뻗은 소나무 숲 사이, 부챗살로 번지는 빛이 따뜻하게 안아준다.

▲역사의 현장에서 현재를 생각하다.
충무공원을 둘러보고 나면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며, 무릎 꿇고 울던 충무공 이순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듯하다. 피 흘리며 쓰러져간 무명 용사와 백성이 부르는 한 맺힌 노랫소리도 들리는 듯하다.
이순신 장군은 부임지에 도착해 제일 먼저 ‘쇠 모으기’를 했다고 전해진다. 볏짚을 모아 단을 만들고, 고기를 잡아 소금에 절이고, 된장도 담갔다.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위기상황에서 이순신 장군의 지도력은 위대했다. 그러나 백성이 없었다면 조선 수군의 승리는 가능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관리인과 대화를 나누며 나라를 구한 영웅이 있게 한 백성을 생각했다.
지금, 세계는 전쟁에 버금가는 위기에 직면해 있다. 모임은 자제해야 하나, 가족이 함께 충렬사에 방문해 충무공 탄신일을 기념하고 충혼탑 앞에 서서 묵념을 하는 건 어떨까?
위기는, 위기에서 배우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이순신 장군과 수군, 의병과 백성이 힘을 모았듯, 우리도 함께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김대연기자·red@/자료제공= 전북도청 전북의 재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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