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가 이주리와 알고 지낸 지 여러 해 됐다. 술친구의 술친구로 만났다. 그림에 대해서나 화가의 삶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서도 연재의 첫 꼭지에 대뜸 이주리 화가를 꼽은 것은 그의 특별한 매력 때문이다. 자질구레한 규범들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추구하면서도, 결코 배타적이거나 냉소적이지 않다. 태도는 겸손하고 시선은 따뜻하다. 타인에 대한 경청과 연민을 잃지 않는다. 요즘 말로 ‘볼매’, 볼수록 매력 있는 사람이다.

이주리는 김제 금구면의 야트막한 골짜기에 혼자 살면서 그림을 그린다. 내비게이션이 알려주는 대로 마을을 지나쳐 산길로 오르다보면 움푹질푹한 비포장길이 나온다. 이 길이 아닌가 싶어 전화해보니 “그 길 맞아요. 계속 올라오세요.”했다. 길 양쪽이 바퀴자국들로 깊이 패여 길 가운데 부분이 볼록해져서 자동차 바닥이 땅을 긁는다. 내 차가 겨우 바퀴만 네 개 달린 낡은 차이기에 망정이지 삐까번쩍한 새 차를 타고는 갈 곳이 못 된다.

통화해서 알려주고도 못미더웠는지 슬리퍼를 신고 마중을 나왔다. 널찍한 마당에는 제 맘대로 난 풀들과 가지런히 심은 토마토, 고추, 딸기, 양상추들이 어우렁더우렁 자라고 있다. 아마도 창고였을 낡은 건물을 고친 작업실은 제법 아늑하다. 이런 산골짜기에 혼자 살면 무섭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안 무서운데 가끔 전주시내에서 오밤중까지 술 마신 후 택시를 타고 올 때 택시기사 아저씨들이 무서워한다고 한다. 산기슭 외딴 집이다보니 주인 없는 고양이는 기본이고 너구리, 고라니 온갖 짐승들이 집주변을 어슬렁거린다고 한다. 오소리 한 쌍이 집안에 들어와 집주인을 아랑곳 않고 놀다 간 적도 있단다. 침입자들도 집주인도 서로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니 과연 이주리답다.

산골짜기에 은거 중이지만, 그는 무명작가가 아니다. 대학 졸업 이후 수십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고 각종 초대전에 참여했다.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전북도립미술관 등에 그의 작품이 소장돼 있고 중국, 대만, 독일, 인도네시아 등 해외의 레지던시에 초대되어 작품 활동을 하는 어엿한 ‘중견작가’다. 자기는 그래도 운이 좋은 편이지만, 그림만 그려서는 도저히 먹고 살기 어렵다고 후배 작가들의 생계를 걱정한다. 어디나 마찬가지지만 가난한 전북지역에서는 특히 그림을 사주는 사람이 없어서 떠나가는 청년작가들이 많단다.

그는 주로 사람의 몸을 그린다. 대개 여러 명의 남자들이 벌거벗은 채 서로 뒤엉켜 몸부림치고 있는 그림들이다. 어떤 그림은 연한 붉은색 톤이고 어떤 것들은 무채색이다. 그림 치수로 100호가 넘는 대작들 안에서 정교하게 묘사된 근육들이 울퉁불퉁 꿈틀거린다. 풍경보다 사람이 어렵고 얼굴보다 근육을 묘사하는 것이 더 어렵다는 얘기를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도 인체의 근육에 대해 오랫동안 연구했다고 한다. 그림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뒤엉킨 사람들의 몸부림과 절규가 생생하고 강렬하다. 고통스럽게 보이기도 하고 역동적이기도 하다. 그의 그림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어느새 그림 속에서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에게 나를 대입하게 된다. 어느 평론가는 그를 “인간 존재의 실존적인 위기감을 적나라하고 진지하게 그리는 화가”라고 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림만 알고 자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미술에 소질이 있는 아이”라면서 어머니에게 그림공부를 시켜보라고 권했단다. 부자는 아니었지만 집안 형편이 그다지 궁핍하지는 않은 편이어서 그림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 어머니 말로는, 시켜보니 아닌 게 아니라 잘했단다. 오랫동안 미술부 활동을 했던 언니보다 오히려 더 잘 그렸다고 한다. 그 자신도 그림 그리는 것이 너무 좋았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틈만 나면 그림을 그렸고, 용돈이 생기면 색연필, 크레파스, 스케치북을 사느라 다 썼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유명한 화가들의 명화를 모사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었다. 여자아이들이 너도나도 피아노학원을 다니는 것이 유행이던 시절이라 부럽기도 했지만, 피아노보다 그림이 더 좋았다.

그렇게 줄곧 그림을 그렸으니 당연히 미대에 들어갔다. 대학 시절에는 1년 365일 학교 작업실에서 먹고 자면서 그림을 그렸다. 명절 연휴 동안에도 집에 가지 않고 텅 빈 미대 건물에 혼자 남아서 그림을 그리다가 밤중에 순찰을 돌던 경비 아저씨를 소스라치게 만든 적도 있었다. 대학 졸업 후에는 어렵게 마련한 작업실의 보증금을 빼서 전시회를 하고나니 오갈 데 없어서 지인이 빌려준 시골 야산의 농막에 들어가 살며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겨우 전기만 들어오고 다른 생활기반시설이 전혀 없는 오두막이었는데 바로 옆에 무덤들까지 있었다. 여러 달 동안 그 무덤가 오두막에서 시글시글한 쥐들과 함께 살면서도 무서운 줄 몰랐단다.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만으로 좋았다.

어느 날 먹을 것도 떨어지고 돈도 다 떨어졌는데, 해외전시에 다녀오면서 쓰고 남은 5달러 지폐 한 장을 발견했다고 한다. 그걸 바꿔서 식료품을 사려고 자전거를 타고 면소재지 농협에 갔더니 환전을 안 해줬단다. 자전거를 질질 끌고 오르막길을 터덕터덕 걸어서 돌아왔다는 짠한 시절 얘기를 하면서 함께 웃었다. 그림 그리는 삶을 후회한 적 없단다. ‘화가’라는 이름에 아직도 가슴이 설렌다고 한다.

이주리는 사람의 몸, 근육과 몸짓을 그리면서 삶의 본질적 물음에 대한 답을 찾으려는 간절한 ‘구도자’다. 요즘 그가 천착하고 있는 화두는 ‘안착과 탈피’다. 최근에 열었던 전시회의 이름도 ‘안착과 탈피에 대한 꿈’이었다. 편안하게 자리 잡는 ‘안착’과 벗어나려는 ‘탈피’를 어떻게 한꺼번에 추구할 수 있냐고 따졌더니, 누구나 내면에 이 두 가지의 욕망이 뒤엉켜 몸부림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알 듯 모를 듯했지만, 더 이야기하면 선문답이 될 것 같아서 포기하고 일어섰다. 술 잘 마신다는 얘기를 신문에 써도 되겠냐고 물었더니, “담배 많이 피운다는 얘기도 써도 돼요.” 그랬다.
/글·사진=윤지용 도서출판기억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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