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한국군이 너무 열악해서 손쓸 틈도 없었어. 손에는 달랑 칼빈소총 한 자루뿐이었지. 적군은 기관총을 앞세우고 새까맣게 몰려오는데….”

6.25사변 70주년을 맞아 금성·은성화랑무공훈장을 받은 손양기(89)옹.

24일 오후 1시께 익산시 송학동 한 자택에서 만난 그는 당시 전란 초기 상황을 회상하며 말을 꺼냈다.

1949년 3월 11일 군에 입대한 그는 당시 서울 북남한동(현 한남동)에 위치한 육군독립기갑연대에서 통신병으로 복무하고 있었다.

손씨는 전쟁 초기 상황에 대해 “너무 많이 죽었어. 한국군은 무장할 수 있는 무기라곤 2차 대전이 끝난 뒤 미국이랑 일본군이 폐기하고 간 카빈소총이 전부였으니까”며 “내려오는 북한군을 대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지”라고 회상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고 70년이나 지났음에도 그는 마치 어제일 같이 당시 한국군의 열악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그는 “그나마 장갑차라고 하나 있긴 했는데, 이거도 미군이 2차 대전 끝나고 버리고 간 거라 잘 움직이지도 않았어”라며 “어마어마하게 내리는 비속을 뚫고 오는 북한군을 보며 후퇴하는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라고 설명했다.

또 그는 한국전쟁 당시 잊지도, 잊을 수도 없는 기억에 대해 털어놨다.

“아직도 기억나 정말 오랜만에 보는 맑은 하늘이었어….”

1951년 5월 7일 설악산 전투가 있던 그날. 북한군 대치 중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일으키는 날씨로 인해 제대로 잠도 이룰 수 없었고, 잘 먹지도 못해 모두가 지쳐가던 때, 유독 그날 맑은 하늘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날 그의 부대는 북한군의 기습을 당해 동료 37명을 모두 잃었다.

당시 통신병이던 그는 “무전장비를 북한군에 빼앗기면 한국군의 정보가 전부다 빠져나갈 수 있어서 얼른 챙겨서 나왔는데, 나를 제외한 부대원들은 빠져나오질 못했어”라며 “그날은 앞으로도 잊지 못하지”라고 회고했다.

“하루 한 번이라도 배식이 나오면 다행이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당시 그들을 지독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렸다.

그는 “이틀에 한 번 보리밥이라도 나오면 다행이지. 끼니를 거르는 건 일도 아니었어”라며 “무릎까지 쌓인 눈밭에 밑창이 닳고 너덜너덜해진 신발 때문에 동상에 안 걸린 사람이 없었지”라고 말했다.

손양기씨는 6·25전쟁에 참전해 무공을 세워 지난 1951년 은성화랑무공훈장. 1954년에 금성화랑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민족의 비극 현장에 있던 그는 “다시는 이념과 사상으로 인한 전쟁은 다시는 일어나면 안 된다”며 “이러한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김용기자·km4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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