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근 전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사람은 태어나서는 모든 것이 미숙하고 백지상태다. 시간이 흐르면서 처음 몸을 움직이거나 옹알이를 한다. 부모들은 숨죽여 아이의 행동을 지켜보다가 그러한 행동이나 옹알이에 반응해 아이에게 애정을 듬뿍 쏟아준다. 아이가 처음 몸을 뒤집는다거나 엄마, 아빠라는 말을 하게 되면 부모들의 감동은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아이들이 성장하면서 경험하고 행동하는 것들은 거의 ‘처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처음’이라는 말은 “시간적으로 또는 차례에서 맨 앞을 의미”하기도 하고, “어떤 일이나 행동을 이전에는 한 번도 경험하거나 해 보거나 이루지 못한 상태임”을 나타내기도 한다. 성경 요한복음에 나오는 “처음(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 말은 시간적으로 또는 차례에서 맨 앞을 의미한다. “우주여행은 이번이 처음이다”라는 말은 이전에 한 번도 경험하거나 해보지 못한 상태임을 나타낸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두에게 처음은 있다. 매일 매일 찾아오는 오늘도 실은 일생(一生)에서 처음 맞이하는 하루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오늘이 내 인생에서 가장 젊은 때라는 표현을 한다. 우리는 오늘을 처음 살고 있다. 우리는 매일 찾아오는 오늘을 살아오면서 오늘을 살기 위해 연습한번 제대로 해 보지 못했다.
평범한 일상도 처음이라는 글자가 더해지면 그 무게감이 달라진다. 새로운 생각과 도전으로 맞이하게 되는 첫 순간들이 있다. 누군가는 부모가 되는 것이 처음이고 아들, 딸이 되는 것이 처음이다. 누군가는 살면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처음 이별을 겪기도 하고, 처음 연애를 해보았을 것이다. 지시만 받다 처음 조직을 이끌면서 지시하는 날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잘 모른다. 처음 하는 것들은 모든 것이 서툴 수밖에 없다.
실수를 하더라도 어린이거나 젊은 사람들은 아직 경험이 없거나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처음이라고 생각해서 쉽게 용서가 되지만, 나이를 먹거나 사회적 지위나 경험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실수에 대해서는 쉽게 용서나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경향이 많다. 이러한 경향에 대해 조지 버나드 쇼는 “모든 일을 용서받는 청년기는 아무 것도 스스로 용서치 않으며, 스스로 모든 일을 용서하는 노년기는 아무 것도 용서받지 못한다.”고 갈파한바 있다.
그런데 모든 인간은 나이와 상관없이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를 한다. 제대로 연습 한번 해보지 못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은 주위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좌충우돌 실수를 연발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관대함과 용서이다. 사람은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고 느낄 때 비로소 조금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이 생긴다. 외국속담에도 “우리 인생에서 사람에 의해 용서받을 필요가 있을 때 용서하는 법을 배운다”라는 말이 있다.
하지만 용서는 하는 사람이나 구하는 사람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용서를 하는 사람은 타인에 대한 관대함과 타인의 약점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되어야 가능하고, 용서를 구하는 사람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잘못을 되풀이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처음’이라는 단어이다. 처음이니까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처음이니까 실수를 많이 한다고 생각하며, 처음이니까 잘못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보자. 처음이라는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면 실수를 하는 사람에게 처음이라 더 관대하질 수 있고, 실수를 저지른 사람도 처음이라 용서받기가 쉽다. 그러면서 상대방에게 “처음 만난 사람처럼 다시 해요”, “새로 처음부터 다시해요”, “처음처럼”이라는 말을 쉽게 건넬 수 있다.
그런데 실수를 저질렀을 때 항상 자신을 탓하고 학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자신의 실수를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일에 사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실수 할 수 있다는 것, 처음이기 때문에 실수 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야만 남을 이해하고 용서할 마음이 생긴다. 남을 용서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용서는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다. 우리의 짧은 인생을 원망과 미움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으며 사는 것 보다는 용서하며 잊고 사는 것이 더 행복하다. 그래서 공자는 “자신을 용서하지 않는 이의 모든 것을 용서하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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