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書)란 모름지기 예(藝)라기보다는 도(道)라 해야 맞다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닦으며, 가슴 속에 본심을 간직하여 밖으로 자신의 행동을 살피는 그런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인가. 부안군 행안면에서 출생한 소남 전진희 선생은, 무릇 서(書)는 서예(書藝)가 아니라 서도(書道)라고 거침없이 말한다.

45년을 한결같이 글씨를 쓰며 산 소남 선생을 남들은 답답하다 할지 모른다. 그러나 붓 잡고 있는 게 그저 좋아서 그 속에 젖어서 산다 하는 선생은, 그 누구보다 자유롭다. 때문에 붓을 들고 있을 때면, 이 세상 아닌 곳으로 훨훨 날아 신선세계로 가는 것 같다고 선생은 또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장자의 『소요유(逍遙遊)편』에는 곤(鯤)이라는 물고기가 나온다. 곤이 변해서 붕(朋)이라는 새가 되는데, 붕새의 등은 몇 천리가 되어 한 번 날면 구름처럼 하늘을 뒤덮어버리고, 바다가 출렁거릴 정도로 큰 바람이 일어 단번에 북해 끝에서 남해 끝까지 날아간다. 부딪힘도 없고, 막힘도 없다. 산 일이 없고, 죽은 일 또한 없다. 그저 모든 관념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저 깊숙한 곳에서 선생은 곤이 되고 붕새가 되어보는 것이려니.

“먹색처럼 많은 색이 없더구만. 농중담에 또 농중담이 있고, 검은 것도 물로 희석하면 갈빛이 나고, 회색빛이 나. 그러기에 천에 그릴 때는 한번에 그리는 게 아니라 연묵을 써. 그 다음 중간묵을 해서 다양한 색을 얻어가는 게지.”

예순 훌쩍 넘은 지금도 붓 잡고 있는 일이 선생은 가장 좋다고 한다. 새벽 두세 시라도 상관없다. 배고픈 줄도 모르고, 시간도 모르고,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는 컴컴한 먹색 속에서 선생은 지극히 살아 있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치를 궁구하고, 몸을 정성되게 하며, 가슴 속에는 본심을 간직하는 것. 그렇게 선생은 인간의 몸으로 나서 신선 세계에 살았다. 살고 있다. 붕새는 구만 리를 여섯 달 동안 쉬지 않고 날아간 후에야 비로소 그 날개를 한 번 접고 쉰다 하는데, 과연 먹색처럼 다양한 색을 얻은 선생이 쉴 곳은 어디인가 묻고 싶어진다.

나는 엄마 앉은자리만도 못하다

소남 선생은 만 19세 때부터 손에 붓을 들었다. 무남독녀처럼 귀하게 자라다가, 학자이자 서당 훈장이었던 외조부의 영향으로 자연스레 몸에 익히게 된 것이 묵 냄새였다. 그렇게 반생을 묵 냄새 속에서 살았지만, 선생은 전혀 질리지 않는 무엇이 묵 속에는 있다 하였다. 하여 하루 세 시간만 자도 된다고 했다.

한 가지에 집중하는 일이란 참으로 지극한 것이어서 보통의 힘만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도 눈에 피로함이 느껴지지 않는 건, 순전히 선생의 어머니 덕이다. 선생의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몸이 약한 선생에게 경칩부터 시작해 절기절기마다 각 절기에 맞는 보약을 지어 먹였다.

“나 사후(死後)에라도 네가 건강하면 내가 보약 해먹인 덕인 줄 알아라.”

워낙 많이 먹어 한약은 입만 대어 보아도 맛을 알게 될 정도라 하니, 보약 먹은 그 횟수를 다 헤아릴 수는 없는 일일 거라. 약재 이름은 말할 것도 없고, 먹어서 몸에 좋은 것인지 안 좋은 것인지도 웬만한 한의만큼은 알게도 되었다. 그러느라 한 번은 인삼과 비슷한 반하를 먹고 목이 맵고 쓰려 얼마간 고생했던 적도 있었노라며, 선생은 긴 목을 손으로 가지런히 쓸어내렸던가.

선생의 어머니는 생각이 열려 있는 신여성이었다. 여자라도 마른자리에 있으려면 배워야 한다면서 수시로 명심보감을 들려주기도 했던 것이다. 교육열이 높은 어머니와 훈장이자 학자였던 외조부. 선생이 지금껏 학문을 즐거움으로 삼고, 붓으로 몸을 닦을 수 있었던 가장 큰 배경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또다시 말한다.

“나는 엄마 앉은 자리만도 못해.”
 
선(線)으로 시작해서 선(線)으로 마무리 되는 민화(民畵)

우주 안의 모든 동식물을 축소하거나 확대해서 다 넣을 수 있으니, 민화란 얼마나 매력적인가. 처음엔 친구 권유로 쉽게 생각하여 다가갔다가 무궁무진한 삼라만상 그 속에 빠져버렸다고, 선생은 처음 민화를 배우게 된 경위를 설명했다.

민화는 민간에서 일상생활 양식이나 관습 등 민속적인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특히 한국민화는 동서고금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양이 방대하고, 질에 있어서도 일반적 민화 수준을 넘어서 기상천외의 독창적인 작품이 많다. 까치호랑이를 좋아하는 선생의 작품도 그렇다. 자연의 경치라든가, 인간 본연의 소박한 신앙의 조형적 표현이 깃들어서인지 순수하고 솔직하다. 웃음을 잃지 않는 익살과 멋도 있다.

애초에 우석대학교에서 배우기 시작했으나, 더 깊은 것을 알기 위해서 나중엔 서울까지 다녀야 했다. 학불염 교불권(學不厭 敎不倦). 본래 배우는 데 싫음이 없어야 하고, 가르치는 데 게으르지 말라 했던가. 서울은 일주일에 한 번씩 갔는데 찜질방에서 먹고 자면서 하루 8시간씩 익혔다. 그래도 전혀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서예는 일필휘지이나 버리는 종이가 많았다. 그런 것에 비하면 민화는 한 번 붓을 잡음과 동시에 단번에 완성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밑그림을 그리고 아교작업을 거쳐 평면에서 입체를 끌어내는 바림을 2차, 3차까지 하면 마무리된다. 선으로 시작해서 선으로 마무리되는 민화의 매력은 거기에 있었다. 버리는 종이 한 장 없이 그림이 다 완성되도록 마음을 그림 속에 두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오방색(五方色)에서 모든 색깔이 다 나오는 것 또한 선생의 호감을 자아내는 데 손색이 없었다. 조개가루로 만든 분채호분 하나만 있으면 원색을 섞어 나오는 색들이 그리도 다양할 수가 없다. 물론 좋은 호분은 상당한 고가이지만, 선생은 언제나 좋은 물감을 선호해왔다. 종이도 육문지를 비롯해 냉금지, 구름지 등 최고급 종이만 활용했다. 좋은 작품은 좋은 종이에서 나온다는 걸 깨닫게 된 것은 간송미술관에서 추사 선생 작품을 보게 되었을 때라고 한다.

서예가 그러하듯 선생에게 있어 민화는 삶과 얼, 멋이 스며 있는 말 그대로 도(道)다. 그러기에 선생이 그린 화조도와 어해도, 산수도, 혹은 문자도와 책가도 등에는 선생의 성품이 배어 있다. 천신과 그 뿌리를 같이한 성품이며, 자연과 그 기운을 같인 한 성품이자 모든 목숨 있는 것들과 그 업을 같이 한 성품이다. 하나를 알아 셋을 품고, 셋을 모아 하나로 돌아간다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것일 거라.
 
병풍 100벌 전시관 갖는 게 꿈이다

예부터 민화는 누구나 좋아할 수 있는 소재인 꽃과 새, 물고기와 물 속, 호랑이와 까치, 십장생 등을 병풍이나 족자로 만들어 감상했다. 소남 선생도 병풍 그리는 걸 좋아하는데, 보통 1벌 하는 데 2년에서 4년은 족히 걸린다고 한다. 현재 단행본 외에 60벌이 완성된 상태다.

소남 선생의 병풍 민화 속에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한마디로 시리즈물이다. 이야기에 따라 원근감도 들어 있다. 접어두었다가 펼치면 한 권의 책이 되어 나오는 게 선생의 병풍 그림일 거라. 방켠에 세워두고 내내 보아도 미묘하고 깊어서 질리지 않을 것 같다. 그런 이유로 최고급 황촉규풀을 넣은 종이를 사용해 그린 <금강산도> 10폭 병풍은 한국민화협회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하게 되어 표지에 실릴 수 있었을 것이다.

병풍 그림을 그리면서부터 선생에게는 소망도 하나 생겼다. 100벌까지 완성하여 전시관을 갖고자 하는 것. 그렇게나마 후손들에게 전통을 물려주고 싶기 때문이다. 해서 선생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말하곤 한다.

“그릇 큰 것 들고 와 다 가져가라.”

내가 쓰고 버린 붓이 태산을 이루어도 아직도 족하지 않다

명필은 붓 타박도 않는다는데, 선생은 언제나 새 붓만 쥐어주면 좋았다. 그렇게 써온 붓이 600자루다. 이사를 몇 번 하는 도중에 책도 없어지고, 생필품도 줄었지만 붓만은 그대로다. 가끔씩 600자루나 되는 붓을 일일이 빨아 보존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어도, 스스로 살아온 역사라 버릴 수 없다.

한마디로 선생은 자신이 들고 살았던 600자루나 되는 붓이기도 하고, 그 모든 붓들을 통합한 단 한 자루의 붓이기도 하다. 하나를 시작하면 어디에 가든 그 붓은 그 하나만 머릿속에 둔다. 단순해서 문 밖을 나가면 안의 일을 다 잊어버리고, 하나에 꽂히면 또 문 안만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한 세계가 끝날 때까지 한참을 놀다 나온다. 그렇게 오랜 세월 붓 속에 은일(隱逸)하여 살다보니, 선생은 우주 만물과도 잘 어울리고, 마음과 기와 몸도 있는 듯 없는 듯 자취 없이 오랫동안 존재하게 된 듯하다. 쓰고 버린 붓이 태산을 이루어도 아직도 족하지 않은 채로 말이다.

“무아(無我) 위는 진아(眞我)의 경지가 있는데, 나는 그 중간에는 이른 것 같아.”

다시 말하지만 소남 선생에게는, 서예도 민화도 예술을 넘어 도(道)다. 그래서 선생의 자취에는 권태가 없다.
/글 사진 김형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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