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희심 명창이 올해를 끝으로 정든 전북도립국악원 생활을 마친다.

창극단 첫 정년퇴임자라는 기록을 갖게 된 천 명창은 오는 19일 도립국악원 목요국악예술무대에서 18년간의 도립국악원 단원으로서 생활을 마무리한다.

천 명창의 고향은 목포. 국악인으로 활동했던 부모님 영향으로 판소리를 일찍부터 접했다.

천 명창의 아버지는 국립창극단과 광주시립에서 활동했던 고수 천대용(광주시무형문화재 제11호 판소리고법)명인이고 어머니도 소리를 했다.

아버지의 권유로 열네 살 때부터 가야금 병창을 시작했고 소리는 스무 살에 입문했다. 고 박봉술 선생께 수궁가를 배우며 소리꾼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이후 고 김상용 선생께 심청가, 춘향가를, 강도근 선생께 홍보가를 사사했다. 또 이난초 선셍께 홍보가, 춘향가를 사사하고, 이일주 선생께 심청가, 수궁가를 사사했다.

“선생님들로부터 소리를 잘한다고 하기보다 ‘좋은 소리’를 가졌다는 칭찬을 많이 들었습니다.”

이런 공부 도중에 남원시립국악단 상임단원과 전북도립국악원 판소리반 교수를 역임했다.

1994년 제28회 진남제 전국 판소리 명창대회 입상을 시작으로 여러 대회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이후 1997년 전주대사습대회에 첫 출전해 3등을 차지한데 이어 2000년 제12회 목포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명창부 장원으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손꼽히는 소리꾼 대열에 합류했다.

완창 발표회도 여러 번 가졌다. 1996년 동편제 흥보가 완창발표회를 시작으로 2000년 흥보가 완창발표회, 2009년 동편제 김세종바디 춘향가 완창발표회를 통해 소리꾼으로서 입지를 다져갔다.

천 명창은 2003년 42살이라는 비교적 많은 나이에 도립국악원 창극단에 입단했다. 이후 18년 간 창극단의 여러 작품에 참가하면서 통성과 수리성 두루 갖춘 자신의 실력을 뽐냈다.

소리꾼의 길을 걷는 동안 갑상선 수술이라는 고비를 집념으로 극복한 천 명창은 이제 퇴임 후 제 2인생을 구상하고 있다.

애초 계획했던 제자들과 함께 하려고 했던 연창회는 코로나 19 상황에 따라 잠시 뒤로 미뤘다. 대신 남편인 권혁대 명고의 기획으로 내년 팔도를 돌며 완창 발표회를 구상하고 있다.

1년 동안 전국을 돌며 판소리 한바탕을 완창 하는 무대는 우리나라에서 첫 시도되는 기획이다.

“창극단 생활 도중 어린 아이들을 항상 곁에서 돌봐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면서 그만 두고 싶을 적도 있었습니다. 이제는 아이들도 내 손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성장했습니다. 창극단을 그만두면 나만의 연습 공간에서 맘껏 소리를 하고 남편의 조언대로 일 년 동안 전국을 돌며 완창발표회를 갖고 싶습니다. 소리를 사랑하는 소리꾼으로 제2인생을 살아보고 싶습니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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