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북의 숙원 사업이었던 ‘전라유학진흥원’ 설립이 가시화됐다. 지난해 전라유학진흥원’ 건립을 위한 기본계획 수립비 2억원을 확보한 것이다. 전북만의 뿌리를 찾기 위해 추진되어 온 ‘전라유학진흥원’이 지금 시대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아본다.

‘전라유학진흥원’설립은 지난 2014년부터 추진됐다. 그 해 전북은 광주전남과 함께 ‘한국학호남유학진흥원’ 설립을 위해 호남권정책협의회를 개최하며 추진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광주전남이 일방적으로 독자 추진하면서 2017년 광주에 ‘한국학호남진흥원’이 들어섰다.

다음해 전북은 독자적인 전라유학진흥원 설립을 추진하면서 타당성 용역을 진행했다. 결과 부안군 진서면 운호리를 예정 부지로 정하고 235억 원 규모의 사업을 준비했다.

하지만 부지로 선정된 지역의 입지 여건에 대한 아쉬움이 있던 차에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으로 알려진 부안 도동서원이 발굴되면서 ‘전라유학진흥원’입지는 자연스럽게 도동서원으로 정해졌다.

도동서원은 소수서원(백운동서원)보다 7년 앞선 1534년(중종29)에 세워졌다.

고려 대표적인 학자이자 정치가로 <고려사> 열전 권 제19에 실릴 만큼 중요한 인물인 부안출신 지포 김구(1211~1278)를 주벽(사당이나 사원에 모신 여러 위패 중에서 주장되는 위패)으로 삼은 서원이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된 뒤 한동안 잊혀졌다. 그러다 지난 2019년 10월 전북도의 발굴조사 학술보고회를 통해 서원부지에 대한 조사를 마쳤다.

사실 도동서원의 부지 발굴은 전라유학진흥원 설립의 가장 튼튼한 기초다. 부안이 조선 성리학을 도입하는데 가장 앞선 지역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동안 조선의 성리학은 주세붕이 풍기군에 백운동서원을 세워 제향한 고려말 유학자 안향의 학맥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영남지역 출신 유학자들인 퇴계와 제자들의 위상이 높아짐에 따라 그동안 영남 유학이 대세를 이루게 됐다. 여기에 박정희 시대 영남유학에 대한 지원을 확대한 것도 한 몫 했다.

김병기 교수는 “성리학을 도입하는 데에는 안향보다 앞서 고려 말의 문신 지포 김구와 그의 두 자제의 역할이 있었음이 밝혀지면서 조선 성리학의 시발이 전북 출신의 유학자로부터 비롯되어 그 맥이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로 평가 받고 있는 간재 전우까지 이어졌다는 학설이 힘을 얻기 시작하였다”며 전북 유학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즉 지포 김구라는 인물이 배향된 한국 성리학의 태동지 도동서원에서부터 한국실학의 비조인 반계 유형원과 그 뒤를 이은 실학자, 그리고 한국 유학의 마지막 계승자 간재 전우까지 전북 유학의 깊은 뿌리는 전라유학진흥원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전북유학의 특징으로 전문가들은 실학과 호국을 꼽는다.

대표적인 인물로 반계 유형원(1622∼1673)이 있다. 조선 효종·현종 때 실학 선구자인 유형원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32세 되던 해 부안현 우반동에 들어왔다. 평생을 학문정진에 힘을 쓰며 <반계수록> 26권을 펴냈다. <반계수록>에 수록된 개혁사상은 영조대에 인정을 받아 국정 개혁의 지표가 되기도 했다. 또 농촌을 부유하게 하고 민생을 넉넉하게 하는 여러 가지 주장은 정약용 등의 후기 실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밖에 수학에 뛰어난 이재 황윤석, 지리학의 대가인 여암 신경준, 사상적으로 깊이가 있는 석정 이정직 등이 중요한 유교문화 자산이다.

또 호남의 유학자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 나라가 침략을 받아 위기에 처할 때 목숨을 걸고 나섰다.

임진왜란 때 일재 이항을 비롯하여 오봉 김재민, 김후진 같은 많은 제자들이 목숨을 바쳤고, 호성군 이주는 평양성 전투에 목숨을 걸로 싸웠다. 병자호란 때는 전주 팔과정(八科亭) 출신들 과거 급제자들이 거의 나선다. 운암 이흥발, 서귀 이기발, 화곡 홍남립, 그리고 백석 유즙과 봉곡 김동준 등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붓 대신 칼을 들었다.

일제 강점기 간재 전우(1841년~1922년)의 제자들도 의병활동에 참여하는 경학공부를 실시했다. 항일 운동을 했던 제자들로 오강표, 박병하, 최병심, 김병주 등이 있다고 한다. 간재 전우는 구한말 일본의 침탈이 노골적으로 진행되면서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부안과 군산의 섬에서 학문을 계속했다. 간재 전우는 ‘유학의 도맥이 끊어지면 나라가 없어지는 것’이라며 한국 유학의 불씨를 지킨 유학자다. 1912년 계화도에 정착하면서 공부와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가 제자들을 길러냈던 강당 등은 지금도 계화도에 남아 있다. 제자만 3000명이 넘는다고 한다.

이런 기반이 있기에 전북 정체성을 확립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전라유학진흥원의 설립이 꼭 필요하다. 그렇다면 전라유학진흥원이 전북 유학의 활성화를 위해 할 일은 무엇일까?

김병기 교수는 “김구와 김구 자제에 대한 학문적 정립을 바탕으로 전북을 한국 성리학의 태동지로 자리매김하고, 그러한 자리매김을 바탕으로 전북을 한국 성리학 나아가 한국 유학의 성지로 부각시켜야 한다‘며 유형원과 뒤를 이은 실학자, 그리고 간재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를 제안했다.

김진돈 문화재위원은 “전북유학이 무엇인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각지에 흩어져 있는 문집을 수집하고 그 문집 속에 있는 전북유학정신이 무엇인가를 끄집어내는 작업을 해야 한다”며 “집적화된 고문서를 토대로 첫 번째 번역사업, 스토리텔링, 그리고 가치가 있는 것은 문화재 지정 등이 시급하다. 이후 정부기관의 정극적인 협조로 관련 전문가 양성, 전북유학 힐링 코스 및 프로그램 개발 등의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전라유학진흥원 설립을 추진한 이영일 전북도 학예연구관은 “전라유학진흥원은 다른 지역의 유학 관련 기관처럼 자료를 수집하는 것보다는 자료의 디지털화와 활용에 중점을 둘 계획”이라며 “전북 정체성을 확립하고 발전시켜나가는 데 제 몫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이병재기자·kanada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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