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제를 만든 최초 기획자이자 독립운동가인 최봉선의 행적을 발굴하고 선양사업을 추진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남원시의회 박문화 의원은 지난 3일 열린 제242회 정례회 제1차 본회의에서 5분 자유발언을 신청, 춘향제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남원이 춘향의 도시로 각인된 것은 최봉선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이같이 제안했다.

박 의원에 따르면 최봉선은 1931년 전국의 권번에까지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광한루 안에 춘향사당을 건립하는 것은 물론, 최초의 춘향영정과 함께 제1회 춘향제를 탄생시킨 인물이다.

춘향제를 만든 기획자로서 상상속 춘향을 현실화시킨 캐릭터 크리에이터이며, 민족문화 수호를 위해 노력한 독립운동가이자, 성별과 신분의 차별을 타파하는 데 앞장선 선구자이며, 영호남 벽을 허문 여장부라고 할 수 있다.

춘향제 80년사에는 1968년 5월 4일부터 6일까지 열린 제38회 춘향제 중 최봉선에 대한 기록이 전한다.

춘향사당을 건립한 이후 계속 제주를 지냈던 68세의 최봉선님이 노환으로 나오지 못하고 대신 조기화씨가 제주가 되어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최봉선은 37회 춘향제 때까지 제주를 지냈는바, 춘향제의 역사이자 증인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최봉선은 춘향제의 제례를 위해 ‘춘향봉향회’라는 단체에 노암동과 주천면의 전답을 기증했다고 전한다. 이러한 헌신적인 노력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것이 오늘날의 ‘춘향문화선양회’다.

또 광한루 누각에는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분들의 한시들 틈에 최봉선이 동생을 잃고 쓴 한시도 포함돼 있다.

이렇게 편린으로 남겨진 최봉선의 흔적을 살펴볼 때 그가 없었다면 오늘의 춘향제가 없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아무도 아는 이가 없고 제대로 된 연구와 기록도 없는 실정이다.

3·1절이 국경일인 이유는 3·1만세운동을 통해 펼쳐진 우리 민족의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이 대한민국의 정신적 씨앗이 되었기 때문이다.

남원시민에게 춘향제가 단순히 지역축제를 넘어 남원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씨앗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 씨앗을 뿌린 사람을 외면할 수는 없다. 지금부터라도 최봉선을 발굴하고 추모하고 기려야 한다.

이에 박 의원은 ▲춘향기념관 등에 춘향제의 시작과 최봉선의 기여에 대한 역사 기록 ▲최봉선의 행적을 발굴하고 정리하는 연구용역 추진 ▲최봉선상 제정이나 최봉선의 날 지정 등의 선양사업을 다각적으로 검토해줄 것을 제안했다.

 

저작권자 © 전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