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근식

새벽 전화를 받았다. 새벽 전화는 반가움보다 겁이 먼저 난다. 좋은 소식이 드물기 때문이다. 뜻밖에 숙경이다. 그녀는 한때 우리 부부의 추억 이야기 중 단골 메뉴였으나 이젠 기억조차 희미한 존재였다.

전화로 들려오는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긴 했지만 분명 오래전에 기억하던 목소리였다.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친구들과 모임을 가졌는데, 내 얘기가 나왔다고 한다. 그녀와 관계를 알고 있는 친구들이 내 전화번호를 눌러 휴대폰을 건넨 바람에 얼떨결에 통화를 하게 된 것이다. 오랜만에 통화한 그녀가 반갑긴 했지만, 잠결에 받은 전화라 안부만 묻고 끊으려 하는데 갑자기 훌쩍거리며 고백을 했다.

그녀를 만난 것은 어느 보육원에서였다. 20대 후반부터 나는 당시 어쭙잖은 실력으로 보육원에서 야간에 보충수업을 해 주는 선생님이었다. 수학과 국사를 가르쳤다. 보육원 아이들은 어느 가정집 아이들처럼 순수했고 나를 잘 따랐다.

그녀는 삼남매 중 막내였다. 아버지가 탄광 광부였는데 진폐증으로 병원에서 입원하고 계셨고, 어머니는 없었다. 생활이 어려웠던 그들 삼남매는 모두 보육원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보육원생 대부분은 부모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라는데, 그들은 삼남매가 입소하여 외롭지 않았다. 그녀가 사춘기가 되면서 문제가 생겼다. 보육원 생활에 염증을 느껴 가출한 것이다. 친구 몇 명이 자기와 함께 살자는 말에 가출을 했다.

가출한 초기에는 이럭저럭 지낼 만했다. 친구 부모님들이 측은한 마음으로 며칠 동안은 함께 지내도록 허락했지만 오래 갈 수는 없었다. 몇몇 친구집을 전전하다 한 달쯤 지나자 결국 갈 곳이 없었다. 그녀의 오빠와 보육원 직원이 설득했지만 보육원에는 절대 들어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그 소식을 아이들과 수업을 하면서 들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그녀를 지켜봤던 나로서는  안타까웠다.

그때가 지금 삽십대인 큰아이가 겨우 돌이 지날 때였다. 아내에게 딱한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그녀를 가족으로 받아들이자고 했다. 당시 전셋집에 방이 두 개여서 함께 생활하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아내는 이십 대 후반에 중학생 어머니가 된 셈이다. 새벽에 도시락을 준비하고 용돈도 챙겨주었다.

그녀는 적응을 잘했다. 지각 한번 하지 않았고, 학교 성적도 제법 올랐다. 게다가 첫째 아이와도 잘 어울려 놀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아내의 학부모 노릇보다 그녀가 아이를 돌봐주었던 것이  아내에게 더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함께 지낸 지 두 달쯤 지난 어느 날, 아내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했다. 돈이 일만원씩 없어진다는 것이다. 죄 없는 사람을 의심한다며 화를 냈지만, 아내는 몇 번이나 시험했다며 틀림없다고 했다. 나는 직장에 입사한 지 2년이 되지 않은 신입사원이라 넉넉한 생활은 아니었다. 받은 봉급으로 아껴쓰면 조금 저축하는 정도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부족한 생활비로 가끔 장모님에게 손을 벌리기도 했다고 한다. 빠듯한 살림살이로 아내가 그녀에게 준 용돈은 부족했을 것이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어린 시절 용돈이 없었다. 그래서 가끔 필요한 용돈을 아버지의 호주머니에 의존한 적이 있다. 아버지가 술에 취하신 날에는 기억하지 못할 때도 있었지만, 십 만 원권 묶음 속에서 천원짜리 한 장을 빼내는 날에는 영락없이 호되게 훈계를 하셨다. 그때 가장 많이 듣던 말이 바늘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말이었다.

아내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주며 모른 척하기로 했다. 다음달부터 용돈을 올려주었다. 그 뒤부터 돈이 없어지지 않았다. 몇 개월을 함께 지낸 뒤 다시 그녀는 보육원으로 들어가고 나는 타지역으로 직장을 옮기면서 기억은 앨범 속의 사진 한 장이 되었다.

그녀는 아내의 가계부에서 돈을 꺼내 간 적이 있다고 했다. 잘못했다며 용서를 빌었다. 그녀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있었지만 용기가 없어 이야기하지 못했다고 했다. 나는 그런 기억이 없다면서 화제를 돌렸다. 그녀는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평범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기뻤다. 우리는 다음에 만날 것을 기약하고 전화를 끊었다.

반가운 새벽 전화였다. 낯선 고백보다 한때 가족이었던 그녀의 목소리가 반가웠다. 아내가 먼저 잠을 청했다. 새벽 3시다. 내일 지각해서 상사에게 꾸지람을 듣더라도 기분은 괜찮을 것 같다. 추억의 앨범을 덮고 잠을 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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