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계 삼봉리 봉화터 산성은 ‘반파가야’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2021년 12월 21일 삼봉리 산성의 발굴조사 성과를 논의하기 위해 열린 자문위원회의에서 전문가들이 내린 결론이다. 산성의 입지와 형태·성벽의 축조방법이 영남지역에서 발견된 가야산성과 유사하고, 산성에서 적지 않은 가야토기가 출토돼 6세기 전반 이전에 장수지역 가야세력에 의해 축조됐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본 것이다. ‘반파가야’ 왕국의 실체가 완전체로서 그 모습을 장계에서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군산대가야문화연구소(소장 곽장근)에 따르면 성벽은 산봉우리를 한 바퀴 둘러 축조한 형태이며 둘레는 300m 내외다. 성벽은 자연 암반 위에 다듬지 않은 석재를 사용해 외벽만 쌓았으며 성돌과 기저부, 성돌과 성돌 사이에는 작은 돌을 끼워 넣는 방식으로 축조됐다. 조사 결과 산성 내부에서는 대부장경호(굽 달린 목 긴 항아리)와 유개장경호(뚜껑 있는 목긴 항아리), 시루 등 가야계 토기와 철제 농기구, 철제 약연(藥?·약재나 찻잎 등을 가는 도구) 등이 출토됐다. 이는 인근 가야 고총군 출토품과 흡사해 상호 밀접한 관련성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철제 약연은 인근 경남 창녕 화왕산성과 경북 문경 고모산성, 부소산성 등에서도 발견된 바 있다. 봉수는 기초부 조성 기법에 비춰볼 때 삼국시대 봉수로 알려진 장수 영취산, 봉화산 봉수와 유사한 것으로 드러났다. 

군산대가야연구소는 그동안 삼봉리 가야고분군을 비롯해 유물, 궁성, 제철유적, 봉화 등을 통해 고고학적으로 ‘반파가야’의 실체를 규명했다. 한국전통문화대학의 이도학 교수, 송화섭 중앙대 교수 등은 문헌사적으로 ‘반파가야’의 존재를 뒷받침하고 있다. 더욱이 이번에 삼봉리 산성을 가야산성으로 전문가들이 인정하면서 ‘반파가야’는 거의 완전체로서 그 모습을 구체화하고 있다. 

‘반파가야’는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기까지 150여 년 동안 무주, 진안, 장수, 임실 등을 강역으로 했다. 철을 바탕으로 백제와 자웅을 겨루다 결국 521년에 백제에 종속된 나라이다. ‘반파가야’는 240여개의 고분을 남겼으나, 상당수의 고분이 도굴돼 유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래도 토기와 구리거울, 오색옥 뿐 아니라 말발굽을 보호하는 편자와 금동신발, 큰 칼, 철제초두 등 당대의 최고 명품들이 전해지고 있다. 궁성은 삼봉리 고분 유적지 서쪽 산 능선 아래 고기리와 동쪽 능선 아래 탑동 두 군데로 추정되고 있다. 

전북 동부지역의 218개 제철유적지 대부분이 ‘반파가야’ 영역에 속하고 있다. 전북혁신도시에 자리 잡은 철기문화가 원료가 풍부한 동부산악지대로 전파되면서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전북가야의 철은 니켈 성분이 많아 최고 등급으로 평가받았다. 전북가야는 철을 다른 가야국 뿐 아니라 중국 등에 수출했다. ‘반파가야’는 또 백제와 전쟁을 벌이며 8갈래의 봉화를 운영한 봉화의 왕국이기도 했다. 

삼봉리 산성은 가야 멸망 이후 6세기 후반에는 신라가 장악했으며, 그 과정에서 집수시설이 운영된 것도 확인됐다. 8세기 전후 시기에 조성됐을 것으로 보이는 화장묘와 나말여초기 토기·기와편, 철기류, 건물 조성과 관련된 주혈(기둥을 박았던 구멍) 등이 발견됐다. 이 같은 양상으로 볼 때 산성 유적은 산성 혹은 봉수 기능으로 축조된 뒤 통일신라시대에 묘역으로 그 기능이 바뀌고, 나말여초기에는 누정(樓亭·누각과 정자)과 같은 시설이 조성됐을 것이라는 게 연구소 해석이다.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는 2021년 12월 20일 전라북도와 함께 국립전주박물관에서 ‘전북 가야사’ 조사 성과와 미래전략을 주제로 학술대회를 열었다. 학계 전문가들이 모여 전북지역의 한·마한·백제·가야, 고고학으로 본 신라의 전북지방 진출, 전북가야의 역사적 실체검증, 제철유적의 조사방법, 전북 동부 가야 봉화망과 그 의미 등에 대해 심층토론을 벌였다. 이처럼 사계의 전문가들이 ‘전북 가야사’를 체계적으로 정립하는 가운데 삼봉리 산성이 가야산성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더욱 더 알차게 ‘전북 가야사’를 정립하고 장계가 ‘반파가야’ 왕도로서 크게 도약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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