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시작된 위기상황이 2년 넘게 지속되고 있다. 내적으로는 5년간 국정을 이끌어갈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진행되고 있다. 외적으로는 북한의 미사일발사 등 도발이 이어지는 가운데 중국, 일본과의 관계가 잘 풀리지 않고 있다. 국가적 어려움의 상당 부분은 우리 스스로 극복할 수 있다. 우리 민족정신이 올바르게 살아난다면 정의와 공정을 바탕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보다 든든히 할 수 있을 것이다. 임실군 오수면 둔덕리에 있는 삼계강사의 역사는 오늘날 대한민국 공동체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다.

삼계강사(三溪講舍)는 광해군 10년(1618년) 둔덕 이씨 등 7개 성씨, 7개 마을이 참여해서 만든 향약으로서 오늘날까지 유지되고 있다. 군현 단위에서 실시되는 향약보다 마을에서 시행되는 동계(洞契)이다. 둔덕 이씨 등 양반들은 상계를 만들고, 마을 주민은 하계를 만든 상하합계이다. 삼계강사는 향약의 4대덕목인 예속상교, 덕업상권, 과실상규, 환난상휼을 기본으로 하고 정부를 대신해 세금과 울력을 징수하고 마을의 애경사를 주체적으로 해결했다.

삼계강사는 미풍양속을 진작시키며, 공동으로 노동을 한 두레적 성격도 가지고 있다. 삼계강사를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강사로서 주민교화의 전통 때문이다. 삼계강사는 서당과 같이 주민을 대상으로 문자와 유학 등의 보통교육을 실시했다. 조선시대 인물의 고향으로 널리 알려진 것도 삼계강사의 공이 컸다. 전라도 인물의 절반은 남원에서 나오고, 남원에서 배출된 인물의 절반은 둔덕에서 나왔다고 한다. 과거 응시자들은 삼계강사에서 봉림대군(효종)과 인평대군의 스승인 최온 선생의 가르침을 받고 난 후 모두 합격했다고 한다. 

삼계강사는 재산의 일부를 기부해 1887년 4월 1일 오수 사립 삼계학교가 창설되게 했다. 그리고 삼계학교는 30년 뒤인 1917년 4월 1일 오수 공립 보통학교로 전환됐다. 삼계강사는 향약의 덕목을 실천하며 민족정신과 항일독립정신을 크게 고취시켰다. 1919년 3월 3일 고종 황제의 국장에 오수 보통학교 설산 이광수 선생과 이기송 애국지사 등이 참석한 사실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오수에서는 3월 10일 보통학교 운동장에서 이광수 선생의 주도로 초등학생들이 만세운동을 일으켰다. 13일, 15일, 그리고 23일에는 오수 시장 등에서 만세운동이 크게 일어난 것이다.

항일독립만세운동으로 이기송 지사 등 둔덕 이씨 16명이 옥고를 치르는 등 오수에서 43명이 투옥됐다. 특히 이주의 지사는 3년 형을 살고 난 뒤 다시 독립운동을 하다가 체포돼 대구형무소에서 복역 중 순국했다. 이주의 지사는 열 손가락, 열 발가락이 잘리는 혹심한 고문을 받으며 목숨을 조국에 바쳤다. 모두 삼계강사에서 시작된 교육의 영향이다. 삼계강사에서 배출된 인물들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일제 침략 등 국가위기 때마다 떨쳐 일어나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실천하려고 했다.

위기와 전환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삼계강사가 400년 넘게 이어온 교화의 이념을 현대적으로 계승하는 데 노력해야 한다. 삼계강사의 본질이 향약인 점을 고려하면 정읍의 고현향약(성종 6년, 1475년) 등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향약을 묶어서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해서 발전시키는 방안을 모색해야겠다. 또한 둔덕 이씨 등 종중마다 국민연금공단의 도움을 받으며 ‘공동체연금’을 만들고 종중의 맥을 이어가는 것도 추진해보기를 권한다. 아울러 오수의 ‘만세 재현 행사’ 등을 삼계강사, 춘성정 고택, 최명희의 『혼불』, 의견 등과 연계시켜 오수를 핫 플레이스로 마케팅하는 전략을 심층적으로 세워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삼계강사의 교육입도(敎育立道) 정신은 오늘날에도 살아서 지역주민에게 오롯이 계승되고 있다. 삼계면에서는 200명에 가까운 박사들이 배출돼 ‘박사마을’로 칭송이 자자하다. 이강국 전 헌법재판소장 등 훌륭한 인물들이 여러 분야에서 활기하게 활동을 하고 있다. 삼계강사는 향약으로서 행복한 공동체의 지속가능성을 살리는 오래된 미래의 표본이다. 이제 독립운동가 이주의 의사의 순국정신을 계승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선택하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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