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수리는 조선시대 임실현 하북면 지역으로 하북면 소재지가 있던 마을로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방동, 막동을 합하여 방수리라 했다.

2017년 12월 31일 기준 으로 방수리 저네면적 4,778,938.1㎡이고 밭은 719,906㎡, 논은 472,890㎡이다. 2021년 11월 30일 기준 인구는 194명(116세대)이다.

방수리에는 영도사 터가 있으며, 재각은 진원박씨의 원모재가 있다. 또 효열비는 한경모 효자정려와 양석지 효자정려가 있으며, 기타 비석으로는 박증석 비와 방동마을애 세심대라는 암각서가 있다.

막동마을

관촌면 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약4km떨어져 있으며 옛 이름은 막골이라고 불렀다. 방미산의 지맥과 회봉천, 좌산천이 합류하는 지점에 마을이 있다고 하여 막동 혹은 막골이라 불렀다고 한다. 따라서 두 하천이 합류하는 지점부터 오원천으로 명명하여 부르고 있다.

처음 조선후기에 구 막골에 화전을 이루고자 몇 집이 모여들어 살았다. 홍수기에는 오원천 상류이기에 홍수에 갇혀 섬과 같이되어 며칠칠동안 오도가도 못했다고 한다. 진원박씨 응춘應春이 입향하여 새로운 터를 이룬곳을 새 막골이라 하고 다리를 건너 첫 마을이 구 막골이라고 한다. 막동마을의 중앙에 능선을 넘어 들어가면 새 막골이다. 지금은 여러 성씨들이 거주하고 있다. 1984년 방동마을에서 막동마을 입구까지지 130여미터의 교량을 가설하였으며, 1991년 막동리의 방미산 아래쪽으로 임실군 상수도 저ㅤㅗㅇ수장을 설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또한 옛적부터 영도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은 폐허되어 있는 마을이기도 하다.

방동마을

관촌면 소재지에서 오원천을 따라 북쪽으로 약 3km떨어져 있으며, 섬진강이 데미샘에서 발원하여 진안 백운면과 마령면을 거쳐서 이곳 방수리 위쪽 회봉리에서 내려오는 물과 합쳐진다. 이로서 수량이 늘어나고 이 물이 방수리 위쪽을 때리면서 자주 범람하곤 했다. 이 때문에 방수리라 부르던 것을 꽃과 같이 아름답고 상서롭다는 뜻으로 방수리라 했다.

1759년 여지도서를 비롯한 임실군 여러 읍지에서 방동을 옛날 치소治所로 기록하고 있는 것을보면 적어도 1413년 임실현의 치소를 현재의 임실읍으로 옮기기전인 고려시대 임실군의 치소였을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곳이다. 이곳에 전하고 있는 방수팔경은 방동마을의 격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조선시대 하북면의 중심지였다고 한다. 방동마을에는 금성나씨와 광산김씨가 정착하였으며, 지금은 여러 성씨가 살고 있다.

마을에 전하고 있는 ‘황장군 부부설화’에 따르면 황장군 부부가 바윗돌로 오원천을 막아 보를 쌓고 농수로와 농경지를 조성했으며, 강변에는 홍수로부터 농경지 보호를 위해 나무를 심어 마을주민을 풍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당시 황장군 부부가 종성한 숲이 마을앞 장제長堤茂林이다. 매년 음력2월 첫 용날에 지내는 마을 제사는 우선 마을 뒷산에 모셔진 소위 황장군 내의 묘소에서 지내고 있다.

장제무림과 관련해 이덕무가 지은 ‘청정관전서’(1795)의 ‘오원천 도깨비보’이야기는 조선 전기 마천 목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이곳 오원천에서 도깨비들과 인연이 있어서 하룻밤 사이에 보를 막았다고 내용이 전하고 있다. 도깨비 보 이야기와 황장군 부부이야기를 함께 고려한다면 당초 방수리를 마천목 개국공신이 제방을 쌓고 후에 잦은 범람으로 재차 제방을 보수하고 나무를 심어 현제에 이른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조성된 장제무림은 길이가 1.6km에 이르며 최근에는 숲을 따라 제방을 구축해 새로운 환경에 숲이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학자들의 이야기가 있고 현재는 제방위에 구절초를 조성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따라서 이 제방으로 형성된 농경지가 육백여 마지기였다고 한다. 1973년에는 방동천에 취입보를 축조해 2017년까지 1일 최대 4만톤 가량을 전주시민의 식수로 통수했다.

 

방동마을에 전해오는 이야기들

- 방동마을 도깨비 이야기

항일투쟁기에 방동에 사시는 나용주 할아버지께서 관촌에 문상을 마치고 술을 마신후 집으로 오는 길에 공덕마을 양수정이르 거쳐 지금의 장제무림 숲 끝자락을 오는데 갑자기 도깨비가 나타났다고 한다. 한참을 도깨비불에 홀려서 따라가다가 보니 물가로 향하기에 정신을 차리고 가던 길을 뒤로하고 되돌아와 집으로 다시 향했다고 한다. 그 이튿날 현장에를 가보니 빗자루 한 개가 그곳에 있었다고 한다.

- 방동마을 구인대(세심대) 이야기

방동마을은 한말 하북면 소재지가 있던 곳이라고 한다. 방동마을에서 황두마을로 가는 옛길 입구 좌측에 세심대라고 쓴 암각서가 있고 그곳을 마을에서는 구인대라고 부른다. 암각서가 있는 바위 위에 정자를 짓고 구인대라고 부르며 게원들이 풍류를 즐기는 곳이었는데 어느 때인가 그곳 정자를 나병환자들이 점령하여 비워주지를 않았다고 한다. 그 후부터 관리가 부실하여 정자는 무너지고 말았다. 그 중에도 구인대 현판 하나가 방동마을 나용주씨가 할아버지의 유업을 기리기 위하여 집에 보관 중에 있다.

- 아홉노인의 방명을 기록하고자 한다.

양동영 운재, 임병학 운곡, 하재륜 석당, 라제운 월정, 한정희 송남, 송진철 운포, 박해용 초산, 박대현 운파, 이기상 죽헌,이며 1925년 4월에 새긴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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