皇華臺
이춘구의 세상이야기

황화대 칼럼-96 후백제견훤대왕 표준어진 Ⅰ

전주시가 견훤대왕(이하 이도학 교수설에 따라 진훤왕으로 표기)의 표준어진을 제작하려고 추진하는 일은 후백제사를 바르게 정립한다는 측면에서 크게 반길만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 모두 진훤왕을 직접 뵌 일이 없으니 미로에서 고민할 것은 당연하다. 그렇지만 48년의 후백제 역사와 진훤왕의 일대기를 살피면 진훤왕의 어진을 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후백제는 대한민국 고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최고의 제국으로 기록되어야 한다. 최고의 제국이라는 자부심과 백성과 더불어 나라를 경영한다는 여민정개의 정신이 오늘 우리가 진훤왕의 어진을 제작하는 기본정신이다.

진훤왕은 889년 순천에서 거병하여 나라를 세우고, 892년 광주에 도읍지를 정하고, 900년 드디어 전주로 천도하여 936년까지 후삼국시대를 주도하였다. 진훤왕은 900년 백제정신을 계승하고 의자왕의 숙분을 풀겠다는 전주선언을 하고 여민정개의 정신으로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진력을 다하였다. 후백제 48년 역사는 581년부터 618년까지 중국 隋 제국의 역사 38년보다 오래된 것이다. 다음으로 탄생설화를 통해 진훤왕의 용안을 유추할 수 있다. 견훤 대신에 진씨로 불러야 한다는 해석은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이도학 교수의 학설이다. 甄萱의 甄은 ‘진’으로 불러야 하며, ‘진’씨는 부여와 백제의 주요 성씨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진훤왕의 탄생설화는 지렁이로 비하되기는 하였지만 제대로 해석하면 하늘로 날아오르는 용이었다. 또한 자랄 때에는 나무 그늘 아래 홀로 남겨진 어린 진훤왕에게 호랑이가 젖을 주었다는 영웅적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진훤왕의 풍모에 대한 기록과 당대의 평가는 어진제작의 중요한 참고자료가 될 것이다. 진훤왕은 “장성하면서체격과 용모가 뛰어나게 기이했고, 뜻과 기상이 빼어나서 평범하지 않았다.” (及壯體貌雄奇 志氣倜儻不凡). 『삼국사기』에 후백제 당대인의 진훤왕에 대한 평가도 남아있다. “대왕의 神武는 보통사람보다 빼어나게 뛰어나 셨고, 영특한 지혜는 만고에 으뜸이라. 말세에 태어나셔서 스스로 세상을 건질 소임을 지고 삼한지역을 순행하시면서 백제라는 나라를 회복하셨으며, 진구렁이나 숯불에 떨어진 것과 같은 고통을 쓸어버리니 백성들이 평안하고화목하게 되어 북을 치고 춤을 추었고, 광풍과 우레처럼 먼 데나 가까운 데나 준마처럼 달려, 功業이 거의 重興에 이르렀습니다.”
진훤왕은 삼한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를 왕건에게 보여주었다. 진훤왕은 고려와의 전투에서 연거푸 승리하였다.

927년 경주 입성과 공산 전투 승리가 하이라이트였다. 진훤왕은 무도한 경애왕을 처단함으로써 자신이 천명한 의자왕의 숙분을 씻은 것이다. 이어서 진훤왕은 신라를 구원하러 온 고려 군대를 대구 공산에서 포위, 궤멸시켰다.

왕건은 신숭겸이나 김락과 같은 참모들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탈출하였다.공산 승전 직후 진훤왕은 왕건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경명왕의 외종제인 헌강왕의 외손을 받들어 왕위에 오르도록 권하여 위태한 나라를 재건하였으니, 임금을 잃고 새 임금을 세우는 일이 그 때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런데도 그대는 충고를 자세히 살피지 않고, 헛되이 떠도는 말을 들어 온갖 술책으로 기회를 노리고 여러 방면으로 침노하였다. 그대는 아직 나의 말머리마저 보지 못하였고 내 소의 터럭 하나도 뽑지 못하였다. 겨울 초에는 도두 색상이 성산진 밑에서 손이 묶였으며, 이 달에는 좌상 김락이 미리사 앞에서 해골을 드러내었으며, 죽고 잡힌 자가 많았고, 추격하여 사로잡힌 자가 적지 않았다. 강약이 이와 같으니 누가 이기고 누가 질 것은 알 수 있는 일이다. 내가 기약하는 바는, 평양성의 다락에 활을걸고 패강 물을 말에게 먹이는 것이다.”

진훤왕은 미륵신앙의 신봉주의자였다. 금산사를 왕찰로서 역할을 하게 하였다. 921년 중국에서 만경강 신창포로 귀국하는 경보스님을 직접 맞이하고 남복선원(남고사)에서 머물도록 하였다. 922년에는 미륵사개탑을 하였다.

목조탑인 중탑을 개탑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당대에 진훤왕은 미륵불의 화신으로서 숭배를 받거나 스스로 미륵불이 되고자 노력하였다. 남원 실상사 철조여래좌상 등 후백제 시대 전후의 불상들도 진훤왕 어진제작에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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