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세계적 명성을 가진 도자기 강국이다. 그렇지만 그 명성이 아주 오래된 것은 아니다. 헤이안 시대부터 스에키라는 도기를 제작해 사용했지만 높은 수준의 기술은 아니었다. 일본 도자기가 명성을 얻게 된 시기는 임진왜란 이후다. 당시 우리나라를 침략한 왜군은 도자기 장인 즉 도공들을 대거 잡아갔다. 이들이 현지에 가마를 짓고 도자기를 구워내면서 비로소 일본 도자기 기술은 선진화 한다.

  일본이 우리나라 도공들에 눈독을 들인 것은 자국의 도자기 제작 기술이 한국이나 중국에 비해 크게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반면 고급 도자기에 대한 일본인들의 선호는 대단했다. 수입품인 중국 찻잔 하나가 성 하나의 값으로 거래될 정도였다니 도자기에 대한 일본인들의 집착이 강했던 모양이다. 조선에서 끌려온 도공들이 자리를 잡으면서 일본 도자기 제작은 새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중국이나 조선에 결코 뒤지지 않는 수준까지 치고 올라온 것이다.
  일본 도자기가 세계적 성가를 누리게 된 결정적 계기는 1837년 오스트리아 빈 만국박람회였다. 당시 우리나라 도공의 후손으로 일본에서 자리잡은 12대 심수관은 거의 2미터에 달하는 대화병을 출품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심수관은 전북 남원에서 사쓰마 영주에게 끌려온 1대조 심당길의 12대 후손이었다. 이 가문은 선조 이름을 그대로 이어받아 쓴다. 심수관 가문이 만든 도자기는 사쓰마야키라는 이름으로 유통됐는데 일본의 3대 도자기의 하나로 꼽힌다.
  사쓰마야키는 ‘일본 최고의 백자’라는 칭호를 받으면서 세계로 수출까지 했다. 12대 심수관은 비기로 투조기법을 만들어 썼다. 도자기에 미세한 구멍을 뚫어 굽는 방식이다. 일본에서도 이 기법을 구사할 수 있는 도예가는 심수관 가문이 유일하다고 한다.
  심수관 가문의 15대 심수관이 9일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조상들의 묘소를 참배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곳에는 청송심씨인 심당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증조할아버지의 묘가 있다. 사쓰마야키라는 명품을 만들어 유명해졌지만 결코 선조들의 땅인 한국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게 심수관 가문의 신조다. 특히 14대 심수관은 한국과의 문화교류에 앞장서서 우리 정부로부터 은관문화훈장을 받았고 명예총영사와 명예 남원시민이 되기도 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무려 4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타국에서 살아온 심수관 가문이 아직도 선조들의 조국에 애정을 잃지 않는다는 게 결코 심상한 일이 아니다. 아울러 한국인들의 빼어난 예술혼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계기도 된다. 도자기 제작기술을 도예로 높이 치는 작금의 세태에서 심수관 가문의 성공은 단연 돋보이는 쾌거다. 다른 문화처럼 K-도자기도 세계로 뻗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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