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복절 77주년 나흘 전인 11일 전북 순창군 인계면 일원에서 고(故) 최강옥 독립유공자의 손자 최기수씨가 과거 조부에 대해 회상하며 태극기로 덮힌 조부의 봉분을 쓰다듬고 있다. /장경식 기자·guri53942@

“일제시대 독립활동과 관련한 책자에서 할아버지 성함을 발견했을 땐 가슴이 찌릿하면서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분이었어요.”

독립의병 자금 전달책을 했던 춘포 최광옥의 손자 최기수(79) 씨는 이번 광복 77주년이 남다르다.

할아버지의 활동상을 수집해 최근 보훈청에 독립유공자 신청 결과가 코앞에 다다르고 있어서다.

최 씨는 “할아버지와 관련된 서류를 확보하기란 말처럼 쉽지 않았었다”라며 “많이 늦은 감이 있지만, 이번 심사를 통과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부모님의 고향 순창이 아닌 서울 서대문형무소 인근에서 태어났다.

독립운동에 참여하며 크게 기울어진 집안은 좀처럼 회복되지 못했고, 일본 순사들에 의한 감시며 고문, 재산몰수 등의 각종 핍박을 받은 데다, 이번엔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직감한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고향인 순창을 황급히 등졌기 때문이다.

본래 고향이었던 순창 심초마을에서 부유하게 자랐지만, 할아버지가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되면서 가세가 기울고 일본 경찰들의 핍박도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그의 할아버지 춘포 최광옥 옹은 을사늑약이 체결 이후 의병에 투신했다.

자료에 따르면 최광옥 옹은 활동 당시 물자를 전달하고 소유하고 있던 논과 밭을 팔아 의병자금으로 기부하는 등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1906년 4월 15일 면암 최익현 선생이 이끈 800여 명의 의병 가운데 한 명으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면암 최익현 선생과 그의 제자들이 체포되어 전주로 압송된 이후 최광옥 옹은 춘계 양춘영(인영, 윤숙)에게 합류해 의병 활동을 이어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의병 자금조달과 폭동 행위 방조로 체포돼 1년 감옥생활 후 7년 뒤인 기묘년 1월 15일에 유명을 달리했다.

일본 순사들의 핍박은 그의 가족에게도 이어졌다.

최 씨는 “당시 할아버지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일본 경찰들은 둘째 작은할아버지를 여러 차례 잡아가 고문했다고 한다”며 “모진 고문 끝에 그가 숨지고, 남은 형제들은 고향을 떠나 뿔뿔이 흩어질 수밖에 없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어 “독립운동 후 가세가 기운 탓에 제대로 공부조차 할 수 없었다”며 “외국까지 가서 일해가며 어렵게 생활을 이어가다가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고 토로했다.

또 그는 “관련 사료가 있는 곳을 수소문해 조각조각 나눠진 할아버지의 발자취를 찾다 보니 할아버지가 잊히지 않고 계속 자손들에게 기억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며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독립유공자 신청을 하게 된 것도 그래서였다”고 이야기했다.

고향 마을에 남아있는 최광옥 옹의 묘소에는 아직 묘소 주인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다.

이에 대해 최기수 씨은 “독립유공자 심사가 지금 진행되는 중이기 때문에, 아직 할아버지 묘소 상석에 묘소 주인과 상주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다”라며 “결과가 나오면 가장 첫 번째로 할아버지가 좋아하셨다는 수정과를 사와 할아버지께 드릴 것”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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