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암서원_(강진군, 전라남도기념물, 문화재청)
▲ 이선제 묘지(보물, 문화재청)

이중호는 전라도 남평(나주) 출신으로, 정여립 모반사건 때 희생된 동인 이발과 이길 형제의 아버지이다. 그의 집안 광주(광산) 이씨 가문은 문과급제자를 10대에 걸쳐 연이어 배출하여 십대홍문(十代紅門)이라고 불린 명문이었으나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이중호는 동부승지를 역임하고 선조 6년 7월에 전라감사로 부임하여 3개월만인 10월에 이임하였다. 

▶십대홍문(十代紅門) 광주(광산) 이씨 
이중호(李仲虎, 1516~?)는 본관이 광주(광산)이며 남평(나주) 출신이다. 남평현은 1914년 일제강점기에 나주에 통합되었으며, 현재는 남평읍으로만 그 지명이 남아 있다. 그의 출생년도는 『문과방목』에도 실려 있지 않으나, 유희춘의 『미암일기』에 병자생(1516년, 중종 11)으로 나온다. 그의 졸년은 미상이다. 
이중호의 자(字)는 사문(士文)이다. 아버지는 홍문관 부제학 이공인(李公仁)이며, 어머니는 거창신씨 신영명(愼榮命)의 딸이다. 그의 처는 해남 윤씨 윤구(尹衢)의 딸이다. 이중호의 집안은 광주 이장동에서 대대로 세거하다가 이중호의 대에 남평 원적동(元積洞, 현 삼포면 등수리)으로 이주하였다. 
이중호의 광주이씨 집안은 문과 급제자가 끊이지 않고, 학문과 행실로 이름이 높았던 호남을 대표하는 명문 거족이었다. 그의 5대조 필문(?門) 이선제(李先齊)는 광주 이장동에서 태어났으며 권근의 문하에서 공부하고 증광시에 장원급제하여 예문관 제학을 지냈다. 낙향하여 향규를 제정하여 풍속을 교화하고, 필문정사를 짓고 후진양성에 힘썼다. 
광주시 전남대 의대에서 조선대, 광주교대를 거치는 거리를 필문로(?門路)라고 하는데 이선제의 호를 따서 붙인 도로명이다. 광주시 남구에 이선제 부조묘(不?廟)가 있으며 광주광역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이선제의 분청사기상감묘지명은 일본에 팔려나갔다가 일본인 소장자가 기증하여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선제의 다섯 아들, 즉 이중호의 고조부 이형원(李亨元) 5형제가 문과에 급제하여 오원가(五元家)로 불렸다. 증조부 이달선(李達善) 대에서 문과급제자가 8명이 나오면서 오원가에 더해 ’오원팔선가(五元八善家)‘라고 칭해졌다. 돌림자인 ‘원’자와 ‘선’자를 따서 붙인 것이다. 
이중호의 아들 이발(李潑)ㆍ이길(李?) 형제까지 문과에 급제하면서 10대에 걸쳐 연이어 문과자가 끊이지 않아 ‘십대홍문(十代紅門)’으로 칭송되었다. 그의 9대조인 이순백에서부터 아들 이발까지 한세대도 거르지 않고 문과에 급제한 것이다. 그의 집안을 두고 ‘홍패로 연폭(連幅)하면 병풍이 된다.’는 말이 있는가 하면 홍패로 병풍을 만들었다는 말도 있다. 홍패는 붉은 패로 문과급제증이다. 

▶호남의 명문 처가 해남 윤씨 
그의 처가인 해남 윤씨도 후대에 윤선도를 배출한 호남의 대표적인 명문이다. 처부 윤구는 기묘명현으로 최산두ㆍ유성춘과 함께 호남삼걸로 불렸으며 홍문관 수찬을 지냈다. 윤구의 아버지가 윤효정(尹孝貞)이며, 증손이 윤선도이다. 
윤효정은 최부의 제자로 해남의 대부호인 호장 정귀영의 딸과 혼인해 해남 백연동(연동)에 정착하였다. 그는 처가의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고 간척으로 대규모 농지를 조성하여 부(富)를 이루고 해남윤씨를 명문으로 도약시키는 기반을 닦아 어초은공파(漁樵隱公派, 연동파) 파조로 받들어지고 있다.
윤효정은 당시 상속제와 다르게 장자 위주의 상속을 시행하였다. 당시의 상속제는 아들 딸 차등 없는 균등 상속이었다. 17세기를 과도기로 장자 위주 상속제로 변화되었는데, 윤효정은 시대에 앞서서 장자에게 몰아 상속하였다. 
윤효정은 중앙 벼슬에 나가지 않고 막대한 부로 자식 교육에 힘을 쏟았다. 아들인 윤구 3형제가 문과에 급제한 후 6대에 걸쳐 문과자가 나왔다. 윤구의 아들 윤의중은 형조판서를 지냈다. 윤구의 증손은 윤선도이고, 윤선도의 증손은 공재 윤두서이다. 해남윤씨 집안은 호남의 대표적인 남인 집안이다. 
이중호의 아들 이발과 이길, 이급이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여든이 넘은 어머니는 무릎을 으깨는 압슬형을 당하면서도 굽히지 않고 죽었는데, 바로 윤구의 딸이다. 이발의 10살 난 어린 아들도 잡혀와 승복하지 않고 죽었다.

▶동부승지를 지내고 전라감사로 부임 
이중호는 미암 유희춘의 문인으로 『표해록』으로 유명한 대학자 최부의 학맥을 이었다. 1540년(중종 35) 25세 때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1552년(명종 7) 37세 때에 식년시 문과에 급제하고, 명종 10년 예문관 검열에 임용되였다. 검열은 전임 사관직인 한림으로, 뛰어난 인재들이 가는 곳이다. 이후 병조좌랑, 사간원 정언 등을 지내고 명종 15년 8월에는 전라도 도사로 재임하였다. 명종 16년 4월 사헌부 지평에 제수되었으며, 이후 병조정랑, 홍문관 교리, 사간원 사간, 직제학 등을 거쳐 선조 5년 승정원 동부승지에 올랐다.
1573년(선조 6) 5월 25일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로 전라감사에 임용되어 7월에 부임하였다. 3개월도 채 안되는 짧은 기간을 재임하다 10월에 이임하였다. 본래 전라감사직은 종2품직인데 통정대부들도 많이 임용되었다. 
전라감사 재임기간이 짧은 것은 사헌부에서 교체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이중호는 명망이 있는 사람이나 번잡한 일은 잘 처리못하고, 게다가 전라도는 토호들이 많아 신역(身役)에서 빠져나간 한정(閑丁)들의 소굴인데 이를 처단하기에 적절치 않다.’고 하였다. 
이중호는 학식과 명망이 있고 순리(循吏)의 기풍이 있으나 유약하다는 평이 있었다. 전라감사에서 일찍 교체된 것은 이런 성향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선조실록』, 6년 9월 기사에 그가 좌부승지에 임용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전라감사 재임 중 좌부승지에 제수되어 서울로 올라갔던 것 같다.
이중호는 선조 7년 2월에 전라감사 보다 아래 급인 담양부사에 임용되었다. 담양도호부사는 종3품직이다. 전라감사 박현민이 담양부사 이중호를 평하기를, ’백성을 편안히 하는 일에 마음을 다하여 옛날 순리(循吏)의 기풍이 있다‘고 하였다. 

 ▶아들 이발이 정여립 사건에 연루되어 멸문지화
호남의 명문거족 광주이씨 이중호 가문은 그 아들 이발, 이길, 이급(李汲)이 정여립 모반사건에 연루됨으로서 멸문지화를 당하였다. 차남 이발은 알성시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동인의 영수가 되었고, 3남 이길도 문과에 급제하고 요직에 올랐었다. 이중호는 이급, 이발, 이길, 이직(李?) 4형제를 두었는데 4남 이직만 일찍 죽어 화를 면했다. 이중호의 생몰년 등이 분명치 않은 것도 역모로 몰려 집안의 많은 자료들이 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 대단한 집안과 이발의 뛰어남이 화를 불렀다. 이중호는 자신이 품은 생각을 잘 표출하지 않았던 것에 반해 이발은 중후하면서도 아버지와는 좀 달랐던 것 같다. 거기에다 선조정권은 정통성이 약했다. 이런 것들이 결국 정여립 모역사건(기축옥사)의 참화를 겪으면서 명문거족을 하루아침에 몰락시킨 것으로 보인다. 이발과 이길 형제는 인조반정 후 1624년(인조 2)에 복권되었다.
1820년(순조 20) 광산이씨 문중에서 강진 수암산 아래에 수암서원(秀岩書院)을 건립하고 이선제를 주벽으로 하여 이조원(李調元), 이중호, 이발과 이길 다섯 분을 모셨다. 1868년에 서원이 훼철되자 1896년 화순에 오현당(五賢堂)을 건립해 향사하였다(화순 향토문화유산). 1919년에 수암서원을 복원하였다.(전라남도 기념물). 

이 동 희 (예원예술대학교 교수, 前 전주역사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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